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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 토오루/논커플링] 추억을, 혹은 희망을 이어가는 몇 가지 방식 上

_Flaneur_ 2016. 7. 9. 17:29

* <쿠드랴프카의 순번은 잘 있는가>의 뒷이야기

* 치유물이라고 쓰고 치명적 노잼 유해물이라고 읽습니다.

* 고등학교 졸업 후 대략 5-6년 후의 이야기


쿠드랴프카의 순번은 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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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센다이 시민도서관 열람과 세키타니 미나토입니ㄷ…….”

 

  아오바죠사이 고교를 졸업한 뒤 몇 년이 지났음에도,

 

  “사서 군! 오이카와 씨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진짜 안 사줄 거야!?”

  “……여보세요? 여보세요? 요즘 전화 상태가 계속 이 모양이네. 미나모토 씨, 내일 가까운 기지국에 전화라도 해 볼까요? 여보세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거 보니까 끊어진 모양인데?”

 

  내가 사서라는 사실과 오이카와 토오루 선배가 진상 이용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이카와 토오루/논커플링] 추억을, 혹은 희망을 이어가는 몇 가지 방식 上

w. Flaneur

 

Chapter 1 : 꽃이 피는 시간

 

  쿠드랴프카의 순번이 제자리로 돌아온 이후, 내 삶은 평범함의 연속이었다. 나는 남들이 보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고등학교 3학년을 보냈고, 센터시험을 준비했고, 무난하게 츠쿠바 대학 도서관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운 좋게 센다이 시에서 가장 거대한 공공도서관의 채용 시험을 통과해 햇병아리 사서가 되었다. 음악 주법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그야말로 레가토(: 음과 음 사이를 끊지 않고 연주하는 것)로 연주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삶 속에서 가끔씩 걸려오던 오이카와 선배의 전화는 레가토로 연주되는 음표 사이에 난입한 스타카토 같은 것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뛰어난 선수가 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그는 가끔씩 좋은 일이 생길 때면 내게 전화를 걸곤 했다. 휴대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대학 배구부에서 신입생인데도 이례적으로 주전 세터가 되었다든가, 천황배 전일본 배구대회에서 1부 리그 팀들을 꺾고 우승에 근접했다든가, 졸업하고 나서 오사카 히라카타 시를 연고지로 하는 세미프로 배구팀에 들어갔다든가 하는 얘기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소식들 앞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 잘 됐네요.’라고 대답하고 나면 그는 세키쨩, 20대의 상큼함은 엿이라도 바꿔 먹었어요?’ 같은 장난스러운 핀잔으로 응수하곤 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놀라운 소식은 그가 조만간 일본 배구 국가대표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코단샤에서 그의 자서전이 출간되었다는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놀라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아직 피지 않은 꽃이 어느 날 갑작스레 피어나는 일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지만 분명 흔치는 않은 일이니 말이다. 세간에서 그런 꽃이 피어나기까지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터였다. 아직 피지 않은 꽃을 위하여라는 이름을 단 그 책은 몇 개월 전 세상에 나와 센다이 미디어테크 3층에 위치한 시민도서관 서가의 한 구석을 차지했다.

 

  “그러니까, 이미 있는 책을 뭐 하러 또…….”

 

  그리고 입사 초기에는, 그 책이 내가 일하는 도서관에 이미 들어와 있으니 그걸로 끝일 줄 알았다.

 

  “그 책은 사서 군이 사준 게 아니잖아!”

 

  하지만 오이카와 선배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시 전화를 건 그는 잔뜩 삐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전에 일부러 전화를 끊어버린 것을 눈치 챈 게 분명했다. 과연 눈치 하나는 빠르다.

 

  “수서과 직원들이 쓸데없이 부지런한 걸 어쩌겠어요. 그저 타이밍이 안 맞았던 것뿐인데 그거 가지고 이러시면…….”

 

  그의 자서전이 세상에 나온 것에도, 그것이 센다이 시민도서관에 들어오는 과정에도 문제는 없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 책이 내가 센다이 시민도서관에 입사하기 2개월 전에 들어왔다는 사실뿐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내가 내 손으로 그 책을 산 일이 없으니 고등학생 시절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거나 다름없다며 툴툴댔다. 그러더니 같은 책을 한 권 더 수서하는 것을 해결책이랍시고 들이밀었다. 하지만 내 말마따나 이건 그저 타이밍 문제였다.

 

  “안 들려! 아무 것도 안 들리거든요!? 세키쨩, 오이카와 씨를 향한 존경심이 식은 거지!? 식었어, 완전히 식었다고!”

  “그렇게 말씀하셔도…….”

 

  내가 해줄 수 있는 딱히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열람과 소속이기 때문이었다. 도서관장의 재량 영역이긴 하지만 도서관 조직은 크게 자료를 선정하고 구매하는 수서과, 그 자료를 분류하는 조직과, 그리고 자료와 이용자를 이어주는 열람과로 나뉜다. 물론 조직이 셋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 조직 간의 교류가 아예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세 조직은 서로가 서로의 고유 업무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일종의 불문율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 열람과 소속인 내가 수서과에 복본 수서 요청을 할 수는 있어도 그 책을 꼭 사도록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경우라면 운이 좋아서 자료 선정 위원회까지 간다고 해도 위원회 선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기각될 것이 뻔했다.

 

  “제가 수서 요청을 해도 수서과에서 기각할 거예요. 없는 예산 가지고 신간 도서 사기도 바쁜 사람들이라서.”

  “사서 군은 수서과도 안 가고 뭐 했어요?”

 

  한낱 신입 사서에 불과한 사람이 배구선수처럼 포지션 선택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 사람은. 나는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것 참 죄송하지만 부서를 골라 갈 처지는 못 돼서요. 오이카와 선배는 머리가 좋으니 이 정도 얘기했으면 납득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만 끊겠습니다.”

 

  탁 소리가 나게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한숨을 쉬었다. 찰거머리 같은 오이카와 선배라도 하루 세 번 연속으로 전화를 해대지는 않을 ㄱ…….

 

  따르르르릉.

 

  전화 끊은 지가 몇 분이나 지났다고. 나는 화면에 뜬 번호를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대부분의 직장인은 이럴 때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목소리를 죽이지만, 목소리의 크기를 죽인다고 목소리에 묻은 짜증마저 같이 죽는 것은 아니다. 이 순간 내 목소리에는 미처 죽지 않은 짜증이 묻어있었을 터였다.

 

  “살 생각 없다고 몇 번을 말해ㅇ……!”

  “뭘 안 산다는 거죠, 세키타니 씨?”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온화한 여자 목소리에 나는 망부석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이케타카 과장님?”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10분 뒤에 볼까요? 어디로 와야 할지는 알고 있겠죠?”

 

  그녀가 말한 곳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서실일 것이다. 그 말에 조용히 알겠다고 답한 뒤 서랍에서 종이 한 장과 편지봉투 하나를 꺼냈다. 나는 누구도 쓰라고 시킨 적이 없는 시말서를 부지런히 채우며 생각했다.

 

  오이카와 선배는 센다이 미디어테크 앞마당에 사는 길고양이 앞발보다도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

 

  건축가 이토 토요는 센다이 미디어테크를 설계할 때 개방성과 투명성을 설계의 대원칙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이 건물에는 이렇다 할 벽이 없었는데, 사서실만은 예외적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물론 그 사서실 역시 투명성을 포기하지는 않은 탓에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사서실에서, 나는 고개를 푹 숙인 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손에는 오이카와 토오루와 길고양이의 효용을 비교해가며 쓴 시말서를 든 채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괜찮아요. 1년차도 안 된 신입이 실수 한 번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요?”

 

  이케타카 나츠미라는 이름을 가진 상사는 시말서를 흥미로운 눈으로 들여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시말서까지 써올 필요는 없었는데, 라는 말과 함께 건넨 미소에서 나보다 오랜 세월을 산 이의 초연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살아온 시간어떤 상황에서든 초연할 수 있는 능력을 맞바꾸는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두 번째부터는 실수라고 여길 수 없을 테지만.”

  “……시정하겠습니다.”

 

  살기 없는 엄격함은 그런 등가교환의 부산물 같은 것일까.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자 그 얼굴은 다시 웃는 낯으로 돌아와 있었다.

 

  “조직과로 가고 싶어 했다고 알고 있는데, 열람과에 있으니 힘든 점이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보려고 불렀어요. 본인 앞가림하기도 바쁠 텐데 인근 대학교에서 실습생까지 와 있으니까……. 혹시 힘든 점이라도?”

 

  평소에는 파업을 밥 먹듯 해대던 직감이 비상사태를 맞아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쳐대고 있었다. 너는 지금 힘든 점이 있어도 없다고 해야 한다고. 이런 상황에 직감만큼 믿음직스러운 것은 없다는 생각에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이제 가 봐도 좋아요.”

 

  드디어 가시방석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에 황급히 사서실을 나서려던 찰나, 장서관리규정의 조항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이 사람이라면 찰거머리 같은 오이카와 선배를 떼어낼 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몸을 돌려 이케타카 과장님에게 물었다.

 

  “과장님, 장서관리규정과 관련해서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뭐죠?”

  “복본 선정 기준에 대해 명확히 알고 싶습니다.”

 

  그녀는 의외라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분명 열람과 소속 사서에게서 나올 질문은 아니라는 생각을 담은 눈빛이었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복본 선정은 수서과의 일이니 내가 굳이 궁금해 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대출 빈도를 측정하는 법은 당연히 알고 있을 테니 생략하고, 열람 빈도를 측정하는 법에 대해 말해주자면……그건 도서에 부착된 RFID 태그를 사용해서 측정한다고 들었어요. 수서과장 말로는 이용자의 희망도서 신청도 복본 선정 과정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하더군요. 답이 됐나요?”

  “,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며 고개를 꾸벅 숙이자, 맞은편에서 도움이 되었다니 나도 기쁘네요.’라는 말이 돌아왔다. 역시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사서들이 기쁨을 느끼는 순간은 다 비슷비슷한 모양이다. 도망치듯 사서실을 빠져나온 나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숫자인 건가.

 

  지식의 가치를 정하는 기준이 숫자라는 게 지독하게 역설적이었지만, 인간이 가장 쉽게 납득할 수 있는 기준 역시 숫자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한없이 가벼운 사람이긴 해도 오이카와 선배 역시 상식인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니 숫자라는 기준을 들이밀면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음번에 전화가 오면 오늘 들은 얘기를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힘없이 책상에 엎어졌다.

 

  퇴근 생각이 간절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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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전개에 따라 끊다보니 분량이 제멋대로고...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