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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 토오루/논커플링] 추억을, 혹은 희망을 이어가는 몇 가지 방식 中

_Flaneur_ 2016. 7. 9. 17:44

* <쿠드랴프카의 순번은 잘 있는가>의 뒷이야기

* 치유물이라고 쓰고 치명적 노잼 유해물이라고 읽습니다.

* 고등학교 졸업 후 대략 5-6년 후의 이야기


쿠드랴프카의 순번은 잘 있는가

추억을, 혹은 희망을 이어가는 몇 가지 방식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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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 토오루/논커플링] 추억을, 혹은 희망을 이어가는 몇 가지 방식 中


Chapter 2 : 모든 것은 그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오이카와 씨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 배구선수로서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데 말이지.”

 

  그가 말하는 인류에 나는 포함되지 않는 모양이다.

 

  “사서 군은 해야 할 일도 안 하고! 직무유기야, 직무유기.”

 

  분명 목소리만 들리는 음성통화가 맞을 텐데,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입을 삐죽거리는 오이카와 선배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나저나 직무유기라니 실례다. 직무유기 중인 건 내가 아니라 선배일 텐데.

 

  “직무유기는 로드워크를 해야 할 시간에 도서관에 전화해서 쓸데없는 항의를 하는 세미프로 배구선수한테나 쓰는 말 아닌가요?”

  “오이카와 씨 로드워크 하고 왔거든요!? 소중한 점심시간을 쪼개서 전화해주는 걸 직무유기라고 하다니 너무해.”

 

  그럼 이럴 시간에 점프서브 연습이랑 토스 연습도 한 100개쯤 하시는 게 어떤가요, 라는 말이 혀끝에 맴돌았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쓸데없는 말로 설전을 이어가봤자 에너지 낭비만 심할 게 뻔했으니까.

 

  “요새 한가하신가 봐요. 지치지도 않고 매일 전화하시는 거 보면.”

  “천황배 전일본 배구대회 4강에서 졌거든. 19일까지는 정규리그 경기도 없으니 계속 휴식이야. 사서 군도 28일부터 쉬지? 연말연시니까.”

  “……올해는 31일까지 안 쉬어요.”

  “, 정말!?”

 

  불행하게도 31일까지 쉬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문부과학성에서 책 읽는 연말이니 뭐니 하며 도서관을 연말까지 열자는 결정을 한 탓이었다. 문부과학성 건물이 있는 카스미가세키 3쵸메 앞에서 그래봤자 사람들은 연말에 책 안 읽는다고 시위라도 하고 싶었지만, 내게는 센다이에서 도쿄까지 가는 것부터가 귀찮음의 연속이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연말까지 도서관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 안 쉬어요. 그런데 졌단 말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 거 아니에요?”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합쳐 6년 내내 전국으로 가는 문턱 앞에서 좌절했던 사람이다. 아무렇지 않게 졌다는 말을 해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 천황배 전일본 배구대회에서는 이미 우승해본 적이 있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그리고?”

  “올해도 8강전에서 우시와카쨩의 팀을 상대로 이겼으니 그걸로 됐어

 

  아, 그러세요. 참으로 오이카와 선배다운 대답이다. 나는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할 생각으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러고 보니 복본 말인데요.”

  “드디어 사줄 생각이 든 거야?”

  “그냥은 무리고, 다음 수서 때까지 그 책의 대출 빈도나 열람 빈도, 아니면 이용자 희망도서 신청 횟수가 눈에 띌 만큼 늘어나면 수서과에 얘기는 해 볼게요.”

 

  이 정도면 적당히 타협할 줄 알았는데 제 딴에는 받아들일 만한 타협안이 못 되었던 모양이었다. 영 못마땅해 하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내게 전해졌다.

 

  “오이카와 씨의 가치를 수치로 환산하면 곤란해. 이래봬도 인류의 꿈과 희망을 찾아주려고 전력투구하는 세터인데.”

 

  책, 혹은 책을 쓴 사람의 가치를 수치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제가 보기에 선배가 생각해야 할 건 인류의 꿈과 희망을 찾아주는 방법이 아니라 배구공을 잘 이어줄 방법 같은데요.”

  “세키쨩은 말이야, 내가 이어주는 게 공밖에 없다고 생각해?”

 

  배구에서 이어줘야 하는 게 그것 말고 또 뭐가 있단 말인가.

 

  “다른 게 또 있나요?”

  “! 대답해줄 시간 없네요! 사람들이 책을 찾는 횟수가 늘어나면 한 권 더 사주겠다는 말이지? 누가 이기는지 한 번 해 보자고, 사서 군!”

 

  그때의 나는 오이카와 선배가 800km나 떨어져있는 책의 열람 빈도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는 없을 거라고 자신했었다. 다시 말하면, ‘열람 빈도가 늘어나면 복본 수서를 고려해보겠다.’는 제안은 그러한 자신감의 발로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얼마나 바보 같은 것이었던가를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그 제안을 받아들인 후 오이카와 선배는 도서관에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 나름대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하루에 한 번씩 걸려오던 전화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내게도 꽤 좋은 일이었는데, 수화기를 붙들고 의미 없는 말싸움을 벌일 시간에 다른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도서의 대출 빈도나 열람 빈도는 다음번 수서 희망 목록을 작성할 때나 들여다보게 될 테니 지금은 신경 쓰지 않는 편이 나았다.

 

  “세키타니 선생님, 전화 왔어요.”

 

  대학원생 이용자의 유료 데이터베이스 접속을 도와주느라 진이 빠져 있던 나에게 유이자키 히카리 씨가 말을 걸었다. 토호쿠 대학교에서 온 실습생인 그녀는 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전화라는 말에 내 얼굴이 잔뜩 찌푸려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잔뜩 흩뜨리며 되물었다.

 

  “전화? 방금 온 건가요?”

  “아니요, 5분 전에…….”

 

  보통 찾는 사람이 자리에 없으면 부재중이라고 말한 뒤에 전화를 건 사람의 이름과 번호를 받아두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유이자키 씨는 왜 전화를 끊지도 않고 5분씩이나 그대로 두었던 걸까.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생각에 잠기자 그녀가 우물쭈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게, 선생님 부재중이시니까 나중에 다시 전화 드린다고 하고 이름이랑 전화번호를 물었더니 선생님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셔서…….”

 

  문제의 데이터베이스가 나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면 10분이고 20분이고 계속 기다릴 생각이었다는 건가. 자리에 없는 사람을 기다려서라도 본인과 통화하려는 사람은 보통 두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감사 혹은 항의. 요새 크게 잘못한 일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책상 위에 놓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 센다이 시민도서관 열람과 세키타니 미나토입니다.”

  “…「아직 피지 않은 꽃을 위하여말인데, 지금 대출중입니까?”

 

  5분씩이나 기다려서 묻는 게 이렇게나 간단한 거라니, 이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인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수화기를 왼손으로 옮겨 잡고는 오른손으로 부지런히 펜을 놀렸다.

 

  「아직 피지 않은 꽃을 위하여대출중인지 확인 좀 해주세요.

 

  완성된 문장을 유이자키 씨에게 내밀자 그녀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결과가 금방 나왔는지 그녀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대출중이라는 뜻이었다.

 

  “, 대출중이네요.”

  “제가급하게 그 책이 필요한데 멀리 있는 서점까지 갈 시간이 안 나서요. 도서관에 소장된 건 한 권이 전부인가요?”

 

  사정이 딱하니 아오야기 문고에 연락해서 상호대차라도 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대답하려던 순간, 이 목소리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애써 자기 목소리를 숨기려고 하지만 책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본인의 진짜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올곧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낸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한 권이 전부입니다. 그 책을……오이카와 선배가 안 빌려주시던가요? 이와이즈미 선배님.”

  “……!”

 

  상대는 당황했는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나인 거 티 많이 났냐?”

  “엄청요.”

  “쿠소카와 자식, 내가 그래서 안 한다고 그렇게 얘기를……!”

 

  오이카와 선배의 자서전 제목을 말하면서 목소리가 분노로 덜덜 떨리던 순간부터 대충 짐작은 했었다. 분명 그가 전화하라고 시킨 것이리라. 나는 정체모를 유대감을 담아 그에게 말을 건넸다.

 

  “오이카와 선배가 부탁했나요?”

  “쿠소카와 자식이 하는 건 부탁이라고 쓰고 반협박이라고 읽어야 맞지 않겠냐.”

 

  과연 명답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스러운 점이 남아있었다. 그는 오이카와 선배가 협박 섞인 부탁을 한다고 해서 굴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민망함을 무릅쓰고 내게 전화를 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평소의 이와이즈미 선배라면 바보 같은 소리라고 한 대 때리셨을 것 같은데요.”

  “그럴 생각이었는데, 그 자식이 앞으로 6개월 동안은 만날 때마다 나한테 맞아도 징징거리지 않겠다고 해서…….”

 

  나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오오,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올곧기만 한 이와이즈미 선배를 어떻게 구워삶았나 했는데 조건 한 번 파격적이다.

 

  “미안하다. 한 살 더 먹어놓고 1년 후배한테 할 짓은 아닌데.”

 

  그는 내가 어이가 없어서 말을 잇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사과했다. 나는 그에게 전해지지도 않을 손사래를 치며 사과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라고?”

  “그런 제안을 받으면 저라도 당연히 전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감탄하던 중이었어요.”

 

  내 말에 그는 안심했다는 듯 사람 좋게 웃었다. 정말이지 어디 사는 누구 씨하고는 다르게 변화구도 던질 줄 모르고 언제나 정면승부를 하려고 하는, 한없이 올곧기만 한 사람이다. 보통은 그런 부탁과 제안을 함께 받았을 때 적당히 꾀를 부려서 빠져나가려고 하지 않던가.

 

  “그러냐.”

  “. 말만 전화했다고 하고 그냥 때리셔도 될 텐데 정말 전화하시는 것도 감탄스럽고요.”

  “쿠소카와한테는 비밀로 ㅎ…어이, 블로킹 제대로 하라고 했잖아!”

 

  블로킹이라. 그도 오이카와 선배처럼 여전히 배구선수 생활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연습 중에 나하고 통화하겠다고 5분을 버린 건가 싶어 갑자기 미안해졌다.

 

  “바쁘신 것 같네요.”

  “, 바쁘다고 하면 바쁘다고 볼 수도 있겠지.”

  “제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그런 건 아닌데. 내가 전화했다는 건 쿠소카와 자식한테는 비밀로 해줘. 그리고 그 자식이 전 주장의 권위를 앞세워서 나 말고 다른 애들한테도 부탁했으니 미야기에 있는 애들이 한 번씩 들이닥칠지도 몰라.”

 

  이와이즈미 선배의 폭로에 나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런 부탁을 세이죠 배구부 전원에게 했단 말인가. 나는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와이즈미 선배님, 과한 부탁일지도 모르겠지만 오이카와 선배가 부탁했다는 배구부원들 사진이랑 이름 보내주실 수 있나요?”

  “메일 주소 불러봐.”

 

  천천히 메일 주소를 불러주자 책상 위에 놔두었던 휴대전화가 바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도착한 메일은 두 통이었다. 배구부 단체 사진이 첨부된 것 하나,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적힌 것 하나. 두 통의 메일을 모두 확인한 나는 꼿꼿하기만 한 내부고발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주제넘은 부탁이니 얼마든지 거절하셔도 됐을 텐데.”

  “쿠소카와 자식이 헛짓하고 다니는 건 눈 뜨고 볼 수가 없거든, 나도.”

 

  그런가요, 라고 중얼거린 뒤 잘 지내시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애초에 이용자의 요구가 늘어나면 복본을 사주겠다는 제안을 한 건 나였으니 결과가 어떻든 그 결과를 받아들일 각오는 얼마든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전개는 곤란했다. 나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배구부원들의 사진을 손톱 끝으로 톡톡 건드려보았다. 손톱과 강화유리가 맞닿으면서 나는 소리만큼 앞으로의 일상이 시끄러워질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

 

  “선생님, 선생님. 저기 저 분 사진 찍고 있는데 목에 걸고 있는 게 임시출입증 하나밖에 없어요. 촬영 허가증은 안 받은 것 같은데요.”

 

  유이자키 씨는 나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북트럭을 끌고 서가에 가려던 차에 촬영 허가증 없이 사진을 찍는 사람을 발견한 듯했다.

 

  건축가의 이토 토요의 명성 때문인지 이 건물에는 책을 빌리러 오는 사람만큼이나 내부 사진을 찍으러 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미디어테크는 내부 촬영을 막지 않는 대신 1층 안내데스크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촬영 허가증을 내주는 것을 나름의 방침으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저 사람처럼 1층에서는 사진기의 자도 안 꺼내다 위층에 올라와서 사진기를 꺼내는 사람에게는 각 층의 담당자가 촬영 허가증을 내줘야만 했다. 여러모로 귀찮기 짝이 없는 방식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수서철을 앞두고 유료 데이터베이스의 접속 횟수와 접속 이력을 따져보던 나는 유이자키 씨가 끌던 북트럭 위에 종이 한 장을 올려놓았다. 국립국회도서관 데이터베이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촬영 허가증 신청 서류를 전해주러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허가증은 내가 들고 갈 테니까 일단 이것부터 작성해달라고 말 좀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북트럭이 드르륵거리며 굴러가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나를 괴롭히던 국립국회도서관 접속이력 정리를 끝내놓고 세 번째 서랍을 뒤적거려 촬영 허가증을 꺼냈다. 유이자키 씨라면 상대가 알아듣게 잘 설명했겠지.

 

  3층 한편의 기다란 책상 앞에서 유이자키 씨는 사진기를 든 상대에게 이것저것 설명한 뒤 종이를 전해주었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종종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뭐지, 생긴 게 유이자키 씨 이상형이었던 건가. 나는 이름표를 들고 느릿느릿 그곳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제법 비싸 보이는 사진기가 놓여있었다. 사진기의 주인은 펜을 쥐고 종이를 채워나가는 일에 여념이 없어서 내가 온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종이를 슬쩍 들여다보았다. 쏟아지는 앞머리 사이로 그 사람의 이름이 보였다. 松川一? 낯익은 이름 앞에서 나는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이름은 이와이즈미 선배가 보낸 메일 속에 있던 이름과 같은 것이었다.

 

  “…….”

  “?”

 

  나른한 얼굴을 한 그는 이종교배를 통해 태어난 돌연변이라도 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생판 처음 보는 남이 자기 이름만 보고 화들짝 놀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 시선에 압도당해 한 걸음 물러서자 그는 짚이는 구석이 있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아아, 너구나. 오이카와가 찾아가라고 한 사람이.”

  “아마도 제가 맞을 테지만, 어떻게 저인 줄 알고……?”

  “그 녀석이 그랬거든. 도서관에서 세상 귀찮다는 표정으로 일하는 남자 직원을 찾으면 된다고.”

 

  딱히 세상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다닌 적은 없는데. 책상에서 촬영 허가증 신청서를 집어든 뒤 그에게 허가증을 내주며 물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뭘 걸고 부탁하시던가요, 마츠카와 씨.

 

  “그 녀석이야 이것만 해주면 오이카와 씨가 소원 하나 들어줄게, 맛층!’이라고 했지만 그냥 해주겠다고 했어. 재미있잖아, 그 녀석이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니는 거.”

 

  한 사람의 똑같은 부탁을 보고 누군가는 차마 눈 뜨고는 못 보겠다고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재미있어 죽겠다고 말하는 상황이 참으로 흥미로웠다. 세이죠 배구부란 도대체 어떤 집단인 걸까.

 

  “희망도서 신청만 하러 오신 것 같은데, 사진기는 왜……?”

  “사실 반차 내고 온 건데 여기 갈 거라고 하니까 회사 직원들이 반색을 하면서 한 번쯤 가볼 때도 됐다고 하더라고. 사진 찍어두는 게 좋을 거라고도 했고.”

 

  감히 자신 있게 말하지만 반차를 내고 여기에, 그러니까 센다이 미디어테크에 온다고 했을 때 반색하는 회사는 없다. 아니, 한 업계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나는 굉장히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답을 꺼내놓았다.

 

  “건축사무소에 다니시는군요.”

  “, 그렇지. 이 근처 아틀리에 아오키(Atelier 靑樹)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아틀리에 아오키. 동명의 건축가 아오키 쥰이 대표로 있는 건축사무소였다. 여러 형태의 공동주택 설계를 통해 공동주거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고 평가받는 곳이었는데, 어울릴 듯 미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사람은 배구를 완전히 놓아버린 걸까? 그리고 그게 아쉽지는 않은 걸까?

 

  “무례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질문을 하나 하고 싶은데요.”

  “해봐, 내가 불쾌해하는 화제는 생각보다 많지 않으니까.”

  “오이카와 선배나 이와이즈미 선배처럼 계속 선수로 활동하지 않고 배구를 놓아버린 게아쉽지는 않으신가요?”

 

  질문을 듣자 얘기하는 내내 나른한 표정이었던 그의 얼굴이 한 순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오이카와라면 몰라도 이와이즈미는 배구선수 아닌데?”

  “……?”

 

  내가 그때 환청이라도 들었다는 건가?

 

  “그 녀석, 교직이수 해서 교원임용시험 보겠다고 했었지. 교육학 점수부터 올려놓겠다고 휴학을 몇 번인가 하다가 교육봉사 시기 놓쳐서 요새 교육봉사 하느라 바쁜 것 같던데.”

  “그럼 그날 통화할 때…….”

  “학교 애들한테 배구라도 가르치고 있었나보지. 그 녀석은 교사가 되면 세이죠로 다시 돌아올 생각인 것 같더라. 생각이 완벽히 정리되기 전에는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도 내 짐작일 뿐이지만.”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내 추론이 보기 좋게 틀린 것이 민망해 고개를 푹 숙였다. 항상 이놈의 입이 문제다.

 

  “그리고 말이야.”

  “……?”

  “넌 졸업 후에도 배구선수로 살지 않으면 배구를 놓은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봐도 무방하지 않나요.”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은데. 가령……여보세요?”

 

  나와 그 사이의 무거운 공기를 가른 것은 마츠카와 씨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한때 배구선수였던 예비 건축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코트 위에 서지 않고도 배구를 놓지 않는 방법 같은 게 있는지를.

 

  “회사에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네.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오이카와는 네가 포기할 때까지 물고 늘어질 테니까 그냥 한 권 사주지 그래? 그리고 오후에 하나마키 녀석이 올지도 모르니 잘 찾아봐. 그 녀석 분홍머리라 엄청 튀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걸?”

 

  자기 할 말만 다 끝낸 그는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펄럭거리는 코트 자락을 황망하게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그에게서 답을 듣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째서인지 세이죠 배구부원들은 부장을 필두로 하나같이 다 제멋대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날 오후, 내가 하나마키 씨를 발견한 곳은 2층 시청각자료실이었다. 일반 단행본과 딸림자료를 함께 3층에 반납해버린 이용자를 대신해 딸림자료를 전해주러 내려갔던 나는 100m 밖에서도 대번에 발견해낼 분홍색 뒤통수와 마주치고 말았다.

 

  문제의 분홍색 뒤통수는 시청각자료실의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블리자드 사에서 나온 오버워치였던가, 정식 출시되자마자 인근 넷카페를 전부 잠식했던 게임이었다. 미디어테크는 도서관 컴퓨터로 게임을 하는 걸 강력하게 제재하지는 않는 터라 게임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그런 사람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이, 어이, 어이, 지금 거기서 그러면……!”

  “…….”

 

  게임을 하면 혼잣말이 느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지만, 혼잣말 치고는 목소리가 너무 크다. 하긴, 헤드폰을 쓰고 있으면 자신의 세계에 존재하는 건 같은 팀원의 목소리와 적의 목소리뿐이니 지금 본인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자각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는 된다.

 

  “, , 야아아아아악!!”

 

  이번 판이 허무하게 끝나버렸는지 하얀 손이 헤드폰을 거칠게 끌어내렸다. 그것도 다 도서관 예산인데 살살 좀 다뤄주시지. 제발 비명만은 참아달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지금뿐인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저기, 게임을 하는 건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비명만은 좀 참아주세요.”

  “, 죄송합니ㄷ…….”

 

  뒤에 사람이 있는 것도 몰랐는지 흠칫 놀라며 사과하는 목소리가 제법 굵었다. 하지만 돌아본 이의 얼굴은 의외로 선이 고왔다. 사진에서 본 얼굴이라는 확신이 들자 나는 재빨리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나마키 타카히로 씨.”

 

  어라, 내가 그 정도로 유명인이었던가? 하고 웃는 얼굴이 장난스러웠다. 그는 내 목에 걸린 사원증을 훑어보더니 손가락질을 하며 외쳤다. , 세키타니 미나토다! 오이카와가 말한 녀석! 그러더니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한 마디를 더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 올 때마다 오이카와 자식 책은 매번 대출중이던데 한 권 더 사서 비치할 생각은 없어?

 

  “그리고 도서관 사서도 어떻게 보면 서비스직인데, 서비스직 선배로서 충고 하나 할까? 서비스업은 미소가 생명이야, 웃어.”

 

  그 말에 나는 별수 없다는 듯 영업용 미소를 지어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꽤나 유쾌한 사람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연두색 의자 하나를 끌어다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게임은 몇 시부터 시작하셨어요?”

  “아마2시부터?”

  “그럼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으셔야 되겠는데요.”

 

  나는 주머니에서 꺼낸 만년필 끝으로 안내문 하나를 톡톡 두들겼다. 도서관 PC로 게임을 하실 경우 다음 이용자를 위하여 PC 이용 시간이 1시간으로 제한됩니다. 그리고 현재 시각은 250분이었다.

 

  “좀 봐주라, 한창 재미있던 참인데.”

  “넷카페는 미디어테크를 나가서 오른쪽으로 가시면 근처에 있습니다. 그리고 서비스직 종사자가 평일에 몇 시간씩 태평하게 게임이나 하고 있어도 괜찮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괜찮아, 괜찮아. 공방은 다른 사람이 지키고 있겠지.”

 

  공방? 설마 내가 생각하는 대로 공예품을 만드는 그 공방이 맞는 건가. 턱을 괴고 영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부모님이 꽃집을 하시거든. 남는 꽃이 아까워서 이것저것 만들다 보니까 공방까지 하게 됐어. 가질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압화 책갈피였다. 크라프트지 위에 가장 찬란한 순간을 박제당한 개나리가 세 송이. 살아오는 동안 손에 닿은 공을 밀어내는 게 일의 전부였던 사람이 만든 것치고는 만듦새가 그럴듯했다. 아니, 그럴듯한 것을 넘어서 잘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남의 호의를 매몰차게 사양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별 의심 없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500엔입니다.”

 

  손가락 다섯 개를 펼치고 싱글싱글 웃는 하나마키 씨의 모습이 퍽 얄미웠다.

 

  “파는 거였어요?”

  “공짜로 주겠다는 말은 안 했잖아?”

 

  이런 데에서까지 서술트릭을 들이밀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는 한숨을 쉬며 남색 카디건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물건을 한손에 그러쥐자 동전 특유의 차가운 감촉이 손에 전해졌다. 엄지와 검지를 움직여 동전을 하나하나 떨어뜨려 보았다. 하나, , , , 다섯. 다행히 500엔은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동전을 꺼내자 보인 것은…….

 

  “450?”

  “하하하하. 너 생긴 거랑 다르게 되게 웃긴다.”

  “50엔은 좀 봐주세요.”

  “싫은데? 아까 매정하게 게임 끝내라고 했으니까 너도 한 번 당해보라고.”

 

  그게 복수씩이나 할 일이냐고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얌전히 450엔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나머지 50엔은 기회가 닿으면 드릴게요. 그 말에 그럼 50엔 들고 공방에 한 번 찾아와.’라고 말하던 그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까 너, 마츠카와한테 배구를 놓아버린 게 아쉽지 않냐고 물었다며?”

 

  그런 얘기는 또 언제 한 건지. 그런 걸 알고 있을 바엔 차라리 서로의 집에 있는 수저 개수를 알고 있는 게 훨씬 생산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적이 있었던 것도 같네요.”

  “남 얘기하는 것처럼 말하네. 나한테는 그거 안 물어봐?”

  “표정만 봐도 어떤지 대충 알겠는데 굳이 물어볼 필요까지 있나 싶은데요.”

  “우와, 매정해. , 나나 마츠카와나 졸업하고 나서 배구공에 아예 손을 안 댄 건 아니야. 시간만 맞으면 후배들 연습상대 해주러 가기도 하니까. 배구를 놓은 적이 없으니 아쉬울 일도 없지.”

 

  하지만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배구와 관련 없는 일을 하게 된 이상,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은 졸업하던 그날 죽어버렸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렇게 죽어버린 추억 앞에서, 이 사람들은 괜찮은 걸까?

 

  “그렇다 해도 추억은 더 이상…….”

  “마츠카와 녀석이 한 얘기하고도 일맥상통하는 말이겠지만 나나 마츠카와, 그리고 이와이즈미가 지금은 정식으로 코트에 서지 않는다고 해서 추억마저 죽어버린 건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죠?”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마키 선생님이 세키타니 학생에게 숙제로 내 주겠습니다. 제출 기한은 아까 못 낸 50엔을 갖다 주러 올 때까지!”

 

  이상하다. 평소의 나라면 저런 말에 그게 뭐냐고 딴지라도 걸었어야 했다. 그러나 확신에 찬 그 얼굴이 오후의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서였을까,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이카와 녀석이 여기에 자기 책이 한 권 더 들어와야 6개월 동안 기간 한정 홉슈크림 나올 때마다 보내준댔으니까 특별히 문제될 이유 없으면 그냥 한 권 사줘. 이건 내 슈크림이 달린 문제라고. 그리고 하나마키 선생님의 옛 추억을 위해서 오버워치 딱 한 판만 더 하면 안 될까, 세키타니 군?”

  “될 리가 없잖아요, 오버워치랑 배구가 무슨 상관이라고 그런……! 그리고 여기서 이러시다 꽃들 다 말라죽는 수가 있어요.”

  “맞다! 아침에 꽃시장에서 사다놓은 꽃에 물 안 줬는데!!”

 

  이제는 퇴근하고 생각이 아니라 없는 병을 만들어서라도 휴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

 

Chapter 3 : 그렇게 하면 추억은 죽지 않는다

 

  요네자와 호노부는 빙과에서 동서고금을 통틀어 시선 때문에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물론 나는 그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검토 대상을 동서고금으로 한정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해리포터시리즈를 쓴 조앤 롤링은 바실리스크라는 뱀을 통해 시선 하나로 모우닝 머틀을 태워 죽이지 않았나.

 

  “…….”

 

  그리고 나는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바실리스크의 환생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사람은 노란 머리에 두 줄의 검은 머리를 한, 살벌한 눈빛의 쿄타니 켄타로였다.

 

  “선생님,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었던 걸까요?”

  “유이자키 씨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다 내 잘못이지…….”

 

  뒷말이 흐려진 자리에 한숨이 밀려들었다. 세어본 적은 없지만 예전에 비해 한숨을 쉬는 횟수가 월등히 늘어난 것 같다. 이 시간에 쿄타니 켄타로가 자신의 삶과 백만 광년쯤 떨어진 도서관 대출대 앞에서 삐딱하게 서있는 것은 분명 나와 오이카와 선배 사이의 그 제안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믿지 못하고, 누군가는 코웃음을 칠 이야기겠지만 나는 쿄타니 켄타로를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그가 미디어테크 앞 죠젠지도오리에 쭈그려 앉아 하는 짓을 몇 개월 지켜본 뒤로는 얼마 남아있지 않은 두려움마저도 사라졌던 상태였다. 하지만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과 입을 꼭 다문 폭주기관차를 막을 수 있냐는 다른 문제였다.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폭주기관차 씨를 막을 능력이 없었다. 나는 이번 달 내 인사고과가 무사하기를 바라며 휴대전화를 꺼내 어딘가로 빠르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갑자기 전화 드려서 죄송합니다. 지금 바쁘신가요?”

  “아니, 수업이 없어서 바쁘지는 않은데. 그 녀석 왔냐?”

  “그런 일만은 없길 바랐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러네요.”

 

  통화 상대가 그 녀석 바꿔.’라고 말한 것을 듣고 나서야 나는 휴대전화를 쿄타니 켄타로에게 내밀었다.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는 듯 단조로운 말투로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쿄타니 군과 통화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요.

 

  “쿄타니냐?”

 

  휴대전화를 넘겨주기 직전 소리를 키워놓은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이와이즈미 선배의 목소리가 작게나마 이쪽까지 들려왔다.

 

  “…….”

  “됐으니까 거기 있지 말고 할 일 하러 가라.”

  “.”

 

  ‘쿄타니는 쿠소카와 말 같은 거 안 들으니까 찾아갈 일이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 녀석이 찾아오면 전화해.’

 

  그때는 흘려들었던 말이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짧은 통화를 끝낸 쿄타니 군이 휴대전화를 내게 집어던지고는 돌아섰다.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한 걸 사과해야겠다 싶어 대출대 아래쪽을 뒤적거려 빨간 상자를 하나를 꺼낸 뒤 그를 불러 세웠다.

 

  “쿄타니 군.”

  “……뭐야.”

 

  제발 그의 손에 무사히 안착하기를 바라며 신중하게 손에 든 물건을 던졌다. 익살스러운 표정의 닭이 그려진 상자가 포물선을 그리며 그의 손에 떨어졌다. 빨간 상자의 정체는 로손의 신 닭튀김군이었다. 이따 점심 때 먹으려고 마지막 남은 하나를 집어온 거였는데.

 

  “이런 일에 말려들게 해서 미안하다고는 생각합니다.”

  “…….”

  “그리고 죠젠지도오리를 어슬렁거리는 그 녀석, 길고양이 주제에 간식은 엄청 가려요. 그러니 쉐바 듀오보다는 이나바 챠오 시리즈가 나을 거예요.”

  “…….”

 

  그렇게 혀를 차고 나가버린 건 어떤 의미였을까. 옆에서는 유이자키 씨가 진짜 무서워…….’라며 울먹거리고 있었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오이카와 선배 말도 듣지 않는 쿄타니 군을 여기까지 오도록 만든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짐작이 가는 자는 이미 있었다. 내 예감이 맞다면, 그는 아마 오늘 오후나 내일쯤 능글맞은 얼굴로 웃으며 나타날 것이었다.

 

-

 

  센다이 미디어테크 1층 카페 플랫화이트 커피 팩토리.

 

  테이블 위에서는 카렐차펙의 로열 애플티와 이 카페의 대표 메뉴인 플랫화이트 라떼가 김을 내뿜고 있었다. 나는 못마땅함을 온몸으로 표현하기 위해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입을 열었다. 거기에 더해 도끼눈을 한 채 상대를 흘겨보는 것은 상대를 위한 특별 대우였다.

 

  “너죠, 쿄타니 군을 여기 보낸 거.”

  “이제 와서 그런 거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쓸데없이 너울가지만 좋은 인간 같으니라고.

 

  약 두 시간 전, 야하바 시게루는 센다이 시민도서관에 찾아와 인지발달이론이랑 관련된 논문 좀 찾아주세요, 세키타니 선생님.’이라고 말하며 넉살 좋게 웃어보였더랬다. 몇 년 전에 찾아왔을 때는 심리학과에서 뇌 구조 탐구만 할 줄은 몰랐다며 우는 소리를 하더니 이번에는 피아제가 그를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논문 몇 개를 찾아 들려주고 끝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는 내가 한때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에게 너무 쌀쌀맞다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인데 연어알 덮밥은 못 사줄망정 커피 한 잔 정도는 사줄 수 있지 않냐는 궤변은 차마 듣기 힘들 정도였다. 물론 나도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없지는 않았던 터라 그 말을 단칼에 잘라버리지는 못했다. 둘이서 미디어테크 밖으로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몇 분 간 실랑이를 벌인 끝에 적당히 눌러앉은 곳이 이 플랫화이트 커피 팩토리였다.

 

  “의미가 없긴 왜 없어요. 쿄타니 군은 오이카와 선배 말도 안 들어먹는 사람인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만든 거예요, 설마 또 멱살이라도 잡았어?”

  “미나토, 넌 내가 시도 때도 없이 다른 사람 멱살잡이나 하는 사람으로 보여!?”

  “아니었어요? 난 또 멱살 잡는 게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침인사나 다름없는 줄 알았지.”

 

  아닌 게 아니라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두 사람은 만나면 잘 얘기하다가도 멱살잡이를 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 광경을 볼 때마다 3학년 6반의 학생들은 처음엔 싸움이라도 났나 싶어 창틀에 매달린 채 웅성댔지만, 나중에는 또 그러는구나 싶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그러니 멱살이라도 잡아서 존경하는 선배의 부탁을 이행하라고 했을지 모른다는 내 추론에 아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 사실 멱살을 안 잡았던 건 아니지만.”

 

  그럴 거라고 이미 예상했기 때문인지 새삼스럽게 놀랍지도 않다.

 

  “그럼 쿄타니 군이야 야하바 군이 본인 쥐어짜는 게 귀찮아서 그랬다 치고, 야하바 군은 존경하는 선배를 위해서 여기에 찾아왔나요?”

  “아니, 그런 이유도 있긴 한데…….”

  “그런데?”

  “널 확실히 설득하면 오이카와 선배가 여자 후배 소개해준다고 했거든.”

 

  그렇다고 그런 제안에 넘어가다니. 어이가 없어서 적당히 식은 로열 애플티를 들이켰다. 사과의 싱그러운 향에 섞여 어이없음이 적당히 희석되는 것 같았다. 나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야하바 군에게 여자 친구가 없는 건 주위에 여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느끼한 표정 탓이 아닐까 하는데요.”

  “미나토오오오오! 우리가 남도 아닌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우리가 옆자리에 앉았던 3개월이 어떤 3개월인데……!”

 

  그 3개월이 어떤 3개월이었냐고 묻는다면, 야하바 군은 놀리기 딱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3개월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장난에 대처하는 능력이 조금은 늘어날 줄 알았더니 여전히 이런 장난에는 약하다. 잘만 하면 찾아오지 않았을 쿄타니 군을 보낸 것에 작은 복수를 해볼까 싶어 한마디 덧붙였다.

 

  “, 엄밀히 따지면 남은 아니죠. 졸업하고 나면 인사하기도 어색한, 남보다도 못한 클래스메이트지.”

  “미나토오오오진짜 못됐어…….”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던 목소리는 이제 울먹거리기 직전이었다. 작은 복수랍시고 놀리는 건 이쯤에서 그만둬야 한다. ‘미안해요, 농담이에요.’라는 말을 건넨 뒤 정말 알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아직 졸업도 안 한 야매 심리학도라고는 해도, 제 선배들을 적잖이 좋아했던 그라면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야하바 군, 배구선수로서 코트에 서지 않아도 추억이 죽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봐?”

  “야하바 군의 선배들이 그러던데요. 배구선수로서 코트에 서지 않고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추억은 죽지 않는다고.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궁금해서요.”

 

  글쎄, 라고 대답한 그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옅은 색 머리카락 위로 겨울햇살이 부서졌다. 한참을 사색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는 지나가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넌 왜 도서관에서 일해?”

  “글을 좋아했지만 글에는 재능이 없었으니까……? 좋아하는 것이 더 좋은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서 이 직업을 골랐어요.”

  “답 말인데,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네.”

 

  야하바 시게루는 다 알면서 왜 물어보냐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일장연설을 시작하기 전 목을 축이려는 듯 플랫화이트 라떼를 집어 들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추억이 죽어버리는 건 아니야. 추억을 죽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그 추억의 주인이지. 넌 네가 좋아하는 글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바랐기 때문에 사서가 됐다고 했지?”

  “그랬죠.”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좋아했던, 그리고 지금도 좋아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내면그렇게 하면 추억은 죽지 않고 이어져, 미나토.”

  “…….”

  “난 선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선배들은 분명 그런 일을 찾아냈기 때문에 추억이 죽지 않은 채 이어진다고 믿는 거겠지.”

 

  그가 입에 달고 다니던 가벼워 보이지만 선배는 존경할 줄 안다.’는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게 이토록 확실한 답을 보여줄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말을 마친 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던 야하바 군은 놀란 목소리로 탄성을 내질렀다. , 벌써 배구교실 가서 애들 가르칠 시간이네.

 

  “고교 배구 선수였던 대학생의 한시적 재능기부 같은 건가요?”

  “한시적이라니! 내가 잠깐 더위를 먹어서 실수로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평범하게 취업을 한다 해도 그만두지 않을 일이라고. 쿄타니 녀석은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투명한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던 그는 잠시 사고 회로가 정지한 듯 굳어있었다. 몇 모금 남지 않은 애플티를 마시던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시선이 같은 곳에 닿은 순간 미묘한 침묵이 테이블을 채웠다.

 

  “쿄타니먼저 가버린 것 같지?”

  “간 것 같네요.”

 

  급박한 손길로 휴대전화를 꺼내든 야하바 군은 전화기를 붙들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어이, 먼저 가는 게 어디 있어! 여보세요!? 여보세요!?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흡사 만담 같은 통화를 주워듣던 나는 가방을 들고 나서는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게 야하바 군과 쿄타니 군, 두 사람이 추억을 죽이지 않는 방식인가요?”

 

  돌아온 대답은 명료했다.

 

  “, 그런 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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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쓰면서 가장 즐거워했던 부분이 아닌가 싶은... 그런 부분.

아무도 안 웃어주는 병맛 드립이 가장 폭발했던 파트가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나만 웃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