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카와 토오루/논커플링] 추억을, 혹은 희망을 이어가는 몇 가지 방식 下
* <쿠드랴프카의 순번은 잘 있는가>의 뒷이야기
* 치유물이라고 쓰고 치명적 노잼 유해물이라고 읽습니다.
* 고등학교 졸업 후 대략 5-6년 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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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 토오루/논커플링] 추억을, 혹은 희망을 이어가는 몇 가지 방식 下
Chapter 4 :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무자비한 신뢰 속에서 찾아낸 것은
톡, 톡, 톡. 생각에 잠겨 있을 때면 튀어나오곤 하던 신발코로 바닥을 치는 버릇이 튀어나왔다. 이 몹쓸 버릇 탓에 내 남색 무지퍼셀만 잔뜩 고생 중일 것이다.
추억을 죽이지 않고 이어가는 법을 알아냈다고 해도, 내게는 아직 알아내지 못한 것이 있었다.
「세키쨩은 말이야, 내가 이어주는 게 공밖에 없다고 생각해?」
오이카와 토오루가 자신의 배구를 통해 이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추억이라고 해 봐야 완벽한 답이 되지 않는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배구선수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의 추억은 죽을 시간조차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가 배구를 통해 이어주고 있다는 것은 분명 자신의 추억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일 테지. 그 답이 그 책 속에 있기 때문에 그는 줄기차게 「아직 피지 않은 꽃을 위하여」를 사라고 했던 걸까.
“아, 선생님 오셨네요. 이거 선생님 안 계실 때 누가 쓰고 간 건데 선생님한테 꼭 전해드려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가던데요.”
유이자키 씨가 종이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이용자 희망도서 신청서. 이번엔 누굴까 싶어 이름 칸을 먼저 빠르게 훑었더니 ‘와타리 신지’라는 이름이 보였다. 같은 학년 학생 중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랐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이 책을 사야 하는 이유가 적힌 칸을 보니 실로 대단한 것이 적혀있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어떤 사람이고 얼마나 대단하며 결론적으로 이 책이 왜 필요한지가 소논문 수준으로 쓰여 있었던 것이다. 하늘에서의 싸움인 배구에서 리베로가 눈에 띄는 순간은 결정적인 디그를 성공시킨 때라고 하던데, 리베로답게 결정적인 힘을 보여주는 신청서였다.
“굉장하네……. 어지간한 신뢰가 아니면 이만큼 쓰기도 힘들 텐데.”
서류철을 꺼내 신청서를 집어넣으며 혼잣말을 했다. 3학년이 세 장, 2학년이 세 장. 하나의 책을, 그것도 복본을 사달라고 이 정도 신청서가 들어온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진에서 본 1학년 두 명의 것이 합쳐지면 이 일은 더욱 이례적인 일이 될 것이다.
“이거 대출 좀 해주세요.”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직원들은 일이 있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심지어 옆에 있던 유이자키 씨마저 뭐가 그리 바쁜지 잰걸음을 치며 사라지는 게 아닌가. 나밖에 없나. 서류철을 제자리에 꽂지도 못한 채 그대로 들고 대출대 앞에 섰다.
“……어?”
책 더미 위 대출카드에 새겨진 이름이 퍽 익숙했다. 国見英.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눈앞에 서있는 사람은 둘이었다. 키가 눈에 띄게 크고 락교를 닮은 소년과 상대적으로 키가 작고 선이 고운 소년. 그리고 이 선이 고운 소년이 입을 열어 꺼낸 첫마디는 매우 신선한 것이었다.
“희망도서 신청서는 오이카와 선배가 시켜서 쓴 건데ㅇ…….”
“야, 쿠니미! 그걸 순순히 털어놓으면 어떡해!”
“뭐 어때, 저 선배도 대충 알아챈 눈치인데.”
일견 졸린 듯 보이는 반달눈과 상황 판단력은 반비례하는 모양이었다. 아주 잠깐 저런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저런 동생이 있으면 머릿속이 시끄러울 일도 없고 좋을 텐데.
“알고 있으니 일단은 그냥 받아둘게요.”
“저기.”
대화에 난입한 것은 락교를 닮은 소년이었다. 락교 군이라고 부를 뻔한 불상사를 간신히 피하고 나서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니까, 킨다이치…미안한데, 이름이 뭐였죠?”
“유타로입니다.”
“그래요, 킨다이치 유타로 군. 물어보고 싶은 게 있나요?”
“저희가 이 신청서를 내면 오이카와 선배 말대로 되는 겁니까?”
나는 펄럭거리는 종이 두 장을 서류철에 끼워 넣고는 그것을 얼굴 근처까지 들어올렸다. 그 서류철이 내 얼굴을 반쯤 가렸겠지만 그런 건 신청서의 운명을 설명하는 데에 아무런 관련도 없을 것이다.
“글쎄요. 책을 사는 건 제 권한이 아니라 수서과의 권한이니 수서과에서 기각시킬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제 선에서 기각시켜야 할지도 모르고.”
“왜죠?”
“센다이 시민도서관 장서관리규칙 제6조 제2항 제9호에는 저자 관련자가 신청한 자료는 선정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으니까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앞서 찾아온 이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던 진실이었다. 관련자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사서의 재량 영역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판단을 보류했던 탓이었다. 결국 이 신청서들은 내가 생각만 고쳐먹으면 얼마든지 기각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오이카와 선배는.”
킨다이치 군은 숨을 몰아쉬더니 긴 얘기를 꺼내려는 듯 무겁게 운을 뗐다. 보는 사람도 절로 긴장하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원하는 게 있을 때 말하면 쉽게 개선해주는 사람이라, 인터하이 이후에 선배가 올려주는 공을 맞추기가 어렵다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만은 ‘아직 바꾸지 말고 가보자.’고 하더군요. 그때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봄고 대표 결정전에서 그 이유를 알았어요. 제 타점이 아직은 공 한 개만큼 앞이었다는 걸, 선배는 알고 있었던 거예요.”
“…….”
“저조차도 모르는 걸 저보다도 먼저 알고 있었던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후배들에게 부탁까지 할 때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제발 수서과까지는 가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한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고전부 시리즈」의 오레키 호타로가 ‘저, 신경 쓰여요!’에 약하다면 난 저렇게 진심으로 부딪쳐오는 사람에게 약하다. 내가 난감해하는 걸 눈치 채서 그런 건지, 필요한 게 있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책 더미를 뒤적거리던 쿠니미 군이 무신경하게 말했다.
“킨다이치, 재활치료 책 없는데?”
“없어? 미안, 아까 책상에서 읽다 두고 왔나봐. 가서 가져올게!”
키가 큰 소년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달려 사라졌다. 나는 일부러 쿠니미 군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무자비한 신뢰네요.”
“…그렇죠. 뭐, 그런 신뢰를 받을 만한 선배기도 하니까요.”
“신뢰 같은 거 안 믿을 사람처럼 보였는데 그렇게 말하니 의외네요.”
어찌 보면 무신경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이 소년이 타인을 그다지 열심히 믿지 않는 나와 닮아보여서 그렇게 말하는 건 절대 아니다. 직감에 의존한 그 말에 소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문답무용의 무자비한 신뢰 속에서…….”
“쿠니미! 기다렸지!”
지금 굉장히 결정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키 큰 소년이 전력을 다해 달려온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1분만 더 늦게 오지.
“대출됐습니다.”
책 더미를 사이좋게 나눠 든 두 사람은 내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뒤돌아 나가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걸어가던 킨다이치 군은 우뚝 멈춰서더니 뒤돌아서 입모양만으로 이렇게 얘기했다. 부탁드립니다.
“뭘 부탁한다는 걸까요?”
“유이자키 씨? 언제부터 와 있었어요?”
아까부터요, 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 그녀는 내 손에 들린 서류철을 보고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고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또 「아직 피지 않은 꽃을 위하여」죠? 오이카와 선수가 요새 유명세를 탄 모양이에요. 열람 빈도도 늘었다 그랬었는데.”
“……네?”
“수서과 선생님들이 그러셨어요. 지금은 대출 중이지만 대출 전에 갑자기 열람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했었다고. 저도 프로그램 손에 익히려고 이것저것 조회해보다가 본 적 있어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설령 특정 인물이 조금씩 유명세를 탄다 해도 일간지 사회면에 대서특필되지 않는 이상 특정 도서의 열람 빈도가 갑작스럽게 증가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내 기억에 오이카와 선배의 이름이 알려질 계기는 없었다. 오이카와 선배를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라면 모를ㄲ…….
‘잠깐, 이미 알고 있던 사람?’
확인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확인에 필요한 것은 하나뿐이다.
“유이자키 씨, 2층 정기간행물실에 가면 인터하이랑 봄철 고교 배구 대회 미야기 현 대표 결정전 책자 모아놓은 곳이 있어요. 최근 5년 치 자료 내에서 아오바죠사이 고등학교 배구부 선수 소개 페이지만 복사해주세요, 최대한 빨리!”
유이자키 씨가 승강기를 향해 질주하는 것을 확인한 나는 「아직 피지 않은 꽃을 위하여」의 열람이력을 출력했다. 센다이 미디어테크, 그중에서도 센다이 시민 도서관의 이용자는 일평균 3500명이다. 이용자 자체가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지난 몇 주 동안 갑자기 이용자들이 홀린 듯이 V리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오이카와 선배를 다룬 놀랄 만한 소식 역시 없었다. 배구 국가대표 최종 엔트리 발표가 남아있지만, 엔트리 발표까지는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다. 그렇다면 열람 빈도를 높인 것은 오이카와 선배와 간접적으로라도 연결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선생님, 복사해왔어요.”
“고마워요, 유이자키 씨.”
몇 장의 종이를 받아든 나는 빨간색 펜을 들고 도서 열람이력과 선수 소개 페이지 둘 모두에 나타나는 이름에 동그라미를 치기 시작했다. 사와키구치 케이스케, 윙스파이커. 칸자키 신이치, 미들블로커. 타카나시 스스무, 리베로…….
“……사사키 유타, 세터. 에가와 유우키, 윙스파이커. 하야미 시로, 미들블로커…….”
놀랍게도 열람 이력에 기록된 것은 지난 5년 간 아오바죠사이 고등학교 배구부에서 레귤러로 활동했던 이들의 이름이었다. 다시 말하면, 오이카와 선배가 세이죠 배구부 OB회를 움직였다는 소리다. 나는 이마를 짚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이 정말……!’
이쯤 되니 차라리 내가 백기투항을 하는 게 낫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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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 당신이 이어준 것을,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도서관 업무의 꽃이라고 불리는 수서 시즌이 다가왔다.
“세키타니 선생님, 그거 수서 요청 목록에 올리실 거예요?”
“올려야죠…….”
“영 안 내키는 표정이신데요.”
“내가 내켜하지 않으면 뭐가 달라지긴 합니까…….”
오이카와 선배는 내 생각보다 치밀하고, 집요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수서 시즌을 맞아 이용자 희망도서 신청 내역과 열람 빈도를 확인해본 나는 항복을 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숫자들에 얽힌 진실은 차치하고라도 숫자상으로는 나의 완벽한 패배였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제 내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아직 피지 않은 꽃을 위하여」를 수서 요청 목록에 올리는 것.
“선생님, 저 책 배가해야 돼서 그런데 먼저 가 볼게요.”
“네, 그러세요…….”
오늘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아메리카노 맛도 썼다. 플랫화이트 커피 팩토리가 답지 않게 원두를 홀딱 태우기라도 한 걸까. 일회용 컵과 뚜껑을 분리해 착실하게 분리수거를 하고 나자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가 한창 대화중이었다. 아이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다. 열람과 사서들의 진정한 과제가 눈앞에 도래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사토루, 오이카와 선수 책이 없어서 슬퍼?”
“응. 지난번에도 없었는데…….”
나는 아이에게 다가가 조용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
“사토루요, 후지사키 사토루.”
“그럼 사토루 군이라고 불러도 괜찮으려나. 사토루 군, 오이카와 선수 좋아해?”
“네, 잘생겼잖아요.”
역시 어린아이들은 사람의 외모를 판단하는 데에 거침이 없다. 천진한 아이의 표정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이 다시 이어졌다.
“오이카와 형이 쓴 책을 찾고 있었어? 읽고 싶었던 이유, 물어봐도 될까?”
“저…배구를 좋아하는데 무지 잘하는 건 아니거든요. 오이카와 형도 천재들 사이에서 힘들어하다가 훌륭한 선수가 됐다고 엄마가 그랬어요. 그래서 그 책을 읽으면 저한테도 희망이 전해질 것 같아서…….”
나는 아이의 말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 충격 속에서 오이카와 선배가 장난스럽게 던진 몇 마디가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장난스럽게 던진 말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같이 뼈가 들어있었던 그 말들이.
「이래봬도 인류의 꿈과 희망을 찾아주려고 전력투구하는 세터인데.」
그가 끝나지 않은 ‘오이카와 토오루의 배구’를 통해 이어주려던 건, 이거였나.
「세키쨩은 말이야, 내가 이어주는 게 공밖에 없다고 생각해?」
그의 무리한 요구는 그저 치기어린 투정에 불과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다고 믿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지는.
“있잖아, 사토루 군. 다음 주에 그 책이 집으로 돌아올지는 모르겠지만 그 책의 쌍둥이 책이 들어올 거야. 그러니까 다음 주에 다시 오면, 사토루 군한테 제일 먼저 빌려줄게. 다음 주에도 올 수 있지?”
하지만 오이카와 선배는 내가 이런 식으로 정답이 ‘희망’이었음을 깨달을 거라는 사실마저 예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초등학생처럼 한없이 유치한 사람인 동시에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었으므로.
1년치 상냥함을 모두 짜내 만들어낸 내 친절한 목소리에 아이가 활짝 웃었다.
“네!”
정말이지, 오이카와 선배는 당해낼 재간이 없는 사람이다.
후지사키 사토루라는 꼬마를 잘 달래서 돌려보낸 뒤, 문득 호기심이 동해 「아직 피지 않은 꽃을 위하여」의 서지정보를 찾아본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손가락을 빠르게 놀려 제목을 치고 엔터키를 누르자 책의 서지정보를 볼 수 있는 버튼이 나타났다. 책의 제목, 발행 연도, 판형, 발행지, 출판사명에 이어 등장한 부제에서 시선이 멈췄다.
「부제: 오이카와 토오루가 전하는 희망」
제목과 부제를 합치니 하나의 완전한 문장이 완성되었다. 완성된 문장을 본 순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오이카와 선배가 왜 그렇게 내 손으로 이 책을 사야 한다고 지치지도 않고 말했는지를.
「아직 피지 않은 꽃을 위하여 오이카와 토오루가 전하는 희망.」
나는 배구를 해본 적도 없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최고의 에너지 절약이라고 믿는 사람이라 체육시간에 뛰어다니는 것조차 내게는 고통이었다. 그러니 공을 이어준 경험과도, 공을 이어주는 순간의 쾌감이나 뿌듯함과도 거리가 먼 게 당연했다. 그런 내 손에, 오이카와 토오루가 던진 공이 들어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배구를 해본 적도 없고, 공을 이어주는 방법조차도 제대로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성가신 공을 떨어뜨리거나 내동댕이치지 않고, 내 방식대로 이어줄 생각이다. 그것이 그가 내게 넘겨준 희망에 대한 예의라고 믿기 때문이다.
수서과에 넘기기 위한 수서 요청 목록을 다시 살펴보았다. 「아직 피지 않은 꽃을 위하여」의 끝부분에서 커서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나는 백스페이스키를 눌러 과감하게 그것을 지워버렸다. 미안하지만 내가 희망을 이어주는 방식은 오이카와 선배가 생각한 것과 조금은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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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택배 왔어요. 도서관 앞으로 온 거 보니까 기증도서인 것 같은데요?”
“그래요? 일단 뜯어서 자료 기증 동의서 있는지 확인만 해주세요. 수서과에 들고 가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유이자키 씨는 ‘저 기증도서 처음 봐요!’라고 작게 외치며 조심조심 상자를 뜯기 시작했다. 기증도서라고 해서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닌데 실무에 처음 투입된 사람 입장에서는 뭐든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자료 기증 동의서를 값비싼 미술품이라도 되는 마냥 조심해서 내 앞에 내려놓았다. 요시타카 치하루라는 이름의 기증자가 책 열 권을 기증한다는 내용이었다.
“미나모토 씨, 기증도서가 왔는데 등록 가능한 책들인지 좀 봐주세요.”
내 말에 수서과의 미나모토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증도서가 왔다는 말에 매우 반가워한 그녀는 책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엄격한 그 눈길에 나까지 조마조마해지는 기분이었다. 기증을 거절당한다면 거절당한 기증자의 심경도 말이 아니겠지만, 그 소식을 기증자에게 전해야 하는 내 기분도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SEALDs:民主主義は何だ?」는 시의성이 있으니까 무난하게 통과할 것 같고… 이건 「ルーンの子供たち:Demonic」 아니야? 이거 절판된다고 해서 총판에 물어봤을 때 못 구한다고 했었는데 잘됐다―. 그리고 이것도……이번 수서 기간 전까지 열람 빈도가 높아서 눈여겨보던 거니까 다 통과될 것 같은데? 이거 우리가 가지고 있어도 되지?”
“네, 그래도 기증자한테 사진 한 장 보내줄 생각이니까 사진 한 장 정도는 찍게 해주세요.”
“그게 뭐가 어렵다고, 마음껏 찍어―.”
물론 사진을 기증자한테 보내준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나는 무음카메라를 켜 조용히 사진을 찍은 뒤, 오이카와 선배에게 사진과 함께 짧은 메일을 보냈다. 메일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선배가 쓴 책, 복본 들어왔으니까 이제 전화는 좀 참아주세요.」
메일을 본 오이카와 선배에게 전화가 온 건 퇴근하기 위해 코트 위에 머플러를 칭칭 감고 있던 때였다. 입마저 막아버린 두꺼운 아이보리색 머플러를 주욱 끌어내린 뒤 전화를 받았다. 전에 없이 상큼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여전히 머릿속이 시끄러워지는 목소리다.
“야호, 사서 군―. 오이카와 씨가 전화 안 하는 동안 오이카와 씨에 대한 존경심이 조금은 자라났나봐?”
“말이 되는 소리를……. 메일에 전화는 참아달라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선배님도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네요.”
그는 후배의 버릇없는 딴지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보였다. 귀를 댄 자리에서 민트색 물방울이 튀어나올 것 같은 착각마저 드는 웃음이었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센다이 시의 야경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씀하셨으면.”
“응?”
“우회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복본을 반입했을 거예요.”
물론 지금 들어온 책도 우회적인 방법을 쓴 거지만, 그건 비밀이다.
“그래도 믿고 있었거든.”
“뭘요.”
“세키쨩이 스스로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순식간에 가라앉은 목소리에서는 곧 국가대표가 될 세터의 날카로운 통찰력이 느껴졌다. 역시 절대 적으로 돌리기 싫은 사람이다. 그 말에 반박이라도 하려는 듯 입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제가 오레키 호타로도 아닌데 그런 걸 어떻게 금방 알아내겠어요.”
“세키쨩, 호타로쨩이랑 꽤 많이 닮았는걸!”
“제가 고전부 시리즈 가지고 장난 좀 쳤다고 오레키 호타로한테 욕을 하시면 안 되죠.”
“아하하하하―. 세키쨩, 그거 웃으라고 하는 말이야?”
미안하지만 웃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오이카와 선배의 개그코드는 일반인과 한참 먼 곳에 위치하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스스로 답을 찾아낼 거라고 믿었다니, 이 사람이 보여주는 문답무용의 무자비한 신뢰는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죽을 때까지 몰랐으면 어쩔 생각이셨는지 모르겠네요. 정말이지 문답무용의 무자비한 신뢰라고밖에는…….”
“그렇지? 오이카와 씨는 그 문답무용의 신뢰로 광견쨩을 길들이기까지 했다고! 오이카와 씨 대단하다고 말해볼래?”
“그 문답무용의 무자비한 신뢰가…….”
“응?”
그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무자비할 정도의 신뢰가,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나를 포함한 꽤 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꿔놨을 거라는 말은
“뭐야, 세키쨩! 오이카와 씨 내일부터 정규리그 다시 시작이거든요!? 오이카와 씨 뒷말 궁금해서 잠 못 자게 만든 다음에 컨디션 난조로 우승 못하게 만들 생각이지!?”
“제가 잠을 못 잘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에요.”
“세키쨔아아아아앙―!”
역시 파나소닉 팬더스(Panasonic Panthers)가 우승한 다음에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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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hind : 세키타니 미나토만 아는 이야기.
“오랜만이에요, 요시타카 선배.”
“세키타니 아니야? SMT (센다이 미디어테크의 약칭) 갔다는 얘기는 들었어. 대단하네, 역시 도서관학과의 공부벌레다워.”
"4년 내내 수석을 달리시다 국립 국회도서관에 입사하신 선배만 할까요. 부탁이 하나 있어서 전화 드렸는데요.”
“뭔데?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들어줄게.”
“선배, 파나소닉 팬더스 좋아하시죠?”
“응, 그렇지. 올해 우승이 눈앞에 있는데 경기 성적이 아슬아슬해서 큰일이야―.”
“제가 근무처에 책을 기증할 생각인데, 선배 이름 좀 빌려주세요. 그럼 파나소닉이 우승할지도 몰라요.”
“세키타니, 직장 그만두고 약 팔고 다니는 거야?”
“그럴 리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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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재미없는 얘기를 30000자씩이나 쓸 수 있지 대단하다 과거의 나...
본교도 아닌 다른 학교 3학년을 이야기할때는 매번 졸업하지 말고 유급해!! 를 외치곤 하는데,
졸업을 피할 수 없는 거라면 모두를 슬프지 않게 하고 끝내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세부설정과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는 트위터에 쓸 생각이에요.
2016.07.09
시간의 틈에서, Flaneu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