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그 책방에는 백일홍이 없다

w. Flaneur


Chapter 3 : 교쿠로노사토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계산대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종이무덤 안에서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아카아시는 졸업논문에 도움이 될까 싶어 가져왔던 참고문헌 더미 속에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자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하루 이틀 친절한 게 아닌 나도 이 자식이 이러니까 도저히 같이 다닐 수가 없다.

  「(사진)

 

  쿠로오가 보낸 라인 한 통과 보쿠토를 찍은 사진 한 장. 사진 속 보쿠토는 제법 큰 백일홍 나무줄기에 매달려있는 채였다. 의도를 알 수 없는 그 행동에 아카아시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쯤, 휴대전화가 요란한 소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전화였다. 통화 버튼을 누른 뒤 휴대전화를 귀에 갖다 대자 듣기 좋은 중저음이 흘러나왔다.

 

  「사진 봤어?

  “, 봤습니다. 보쿠토 씨는 왜 그러고 있는 겁니까.”

  「거기 매달려있으면 그럴듯한 생각이 날 것 같다더라.

  “여전하네요, 보쿠토 씨도.”

 

  안 그래도 이 꼴을 2년이나 본 네가 존경스러워지려는 참이야.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손윗사람에게 존경의 눈길을 받는 것을 굳이 사양할 생각은 없었지만, 존경의 눈길을 받는 것보다 급한 건 무시무시한 하중을 견뎌내고 있을 백일홍 나무를 구하는 일이었다.

 

  “계속 매달려 있다가 학사경고 받아도 책임 못 진다고 하시면 내려올 겁니다. 보쿠토 씨, 낙제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이니까.”

  「안타깝게도 낙제 플래그는 오래 전에 꽂혔어. 저 녀석, 며칠 전에 졸업시험 재시험 통보받았다고.

  “……올해졸업은 요원한 겁니까.”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의 경악과 한 주먹의 걱정이 섞인 한마디가 아카아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한마디에 드리운 걱정의 그늘이 상대에서도 느껴졌는지, 휴대전화 건너편에서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그 책방은 이름을 바람 잘 날 없는 부엉이 둥지라고 짓는 게 나았겠어.

 

  그것은 분명 자신을 반쯤 놀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쿠로오의 농담 섞인 도발에 꽤 익숙했던 아카아시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지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채.

 

  “그건 너무 직설적이잖습니까.”

  「……오야? 지금 그 말, 사루스베리 서사라는 이름이 우회적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느물느물한 목소리에 가려지긴 했어도 그 질문에는 뼈가 있었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위기를 타파할 계기정도는 스스로 만들어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계기가 외부에서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오래 전 네코마의 부주장 카이 노부유키가 떡하니 튀어나온 자신의 조커를 뽑아주었던 그때처럼 손님 한 명만 찾아온다ㅁ…….

 

  딸랑.

 

  “손님이 왔으니 이만 끊겠습니다.”

 

  아카아시는 상대의 말을 듣지도 않고 화면 속 붉은 버튼을 줄기차게 눌렀다. 금세 화면이 어두워지며 한 세계와 또 다른 세계가 단절되었다. 고양이처럼 교묘하기 짝이 없는 유도심문에 걸려들 뻔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카아시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사루스베리 서사입니다.”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 인사는 여전히 칼 같네.”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손님은 손님이니까요. 하시는 행동을 보니……밖에 비가 오는 모양이네요, 스가와라 씨.”

  “, 여우비인 모양이야. 일단 창문부터 닫는 게 좋지 않을까?”

 

  한 손에 죽세공 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부산스럽게 젖은 머리를 터는 스가와라 코우시를 향해서.

 

-

 

  굳게 닫힌 폴딩도어 바깥쪽에서는 여우비가 후드득거리며 떨어지고, 안쪽에서는 녹차를 우리기 위한 물이 살살 끓고 있었다. 작은 원목 테이블 두 개를 이어붙인 자리에서는 물을 끓이기 위한 티워머와 유리 티포트, 도자기 찻종 두 개, 차호(: 잎차를 넣어두는 통), 아카아시가 읽다가 엎어놓은 한국어 책 그림자 여행이 제자리를 찾느라 분주했다. 만든 이의 개성이 느껴지는 다구들은 스가와라 본인이 세토모노마츠리(주: 아이치 현 세토 시에서 열리는 도자기 축제)까지 찾아가서 사온 것이라고 했다. 그새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 것을 확인한 그는 티워머 속 티라이트를 끈 뒤 티포트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어느 쪽으로 할래?”

 

  차호를 열어 내용물을 보여준 스가와라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검붉은 빛의 잎차가 들어있는 통과 짙은 녹색의 잎차가 들어있는 통. 아카아시는 짙은 녹색의 잎차에서 자신의 눈동자 색과 같은 색을 보았다.

 

  “녹색으로 하겠습니다.”

  “우리 괴짜 콤비가 타점에서 멈추는 토스를 올린다는 걸 알아봤을 때부터 배구를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차를 보는 눈도 있구나, 아카아시는.”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 차, 시즈오카 현의 교쿠로노사토(玉露)(: 시즈오카 현 후지에다 시 오카베쵸에 위치한 최고급 녹차 생산지)에서 가져온 옥로(玉露)(: 찻잎이 나올 무렵 그늘을 만들어 햇빛을 덜 받게 만든 최고급 녹차)인데 엄청 비싸거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얼마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스가와라는 놀랄 텐데, 라고 말하며 해사하게 웃었다. 초여름이라는 계절이 사람으로 태어나 근심걱정 없이 웃었다면 틀림없이 저런 표정이었을 것이다.

 

  “5천 엔.”

  “……비싸네요.”

 

  5천 엔. 사쿠라신마치에서 비싸다고 소문난 프렌치 비스트로의 저녁식사 가격이 2천 엔이다. 이 문제의 옥로차는 그 저녁식사보다 두 배는 비쌌다.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단정하게 내려놓은 아카아시는 그런 차를 같이 마시자고 가져온 이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제게 차를 보는 눈이 있다고 해도, 그런 차를 취급하는 사쿠라비요리(桜日和)의 주인만 할까요.”

  “역시 한 마디도 안 져주네.”

 

  찻집 사쿠라비요리의 젊은 주인, 스가와라 코우시가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아카아시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추억에 잠긴 것을 보니 그들이 처음 만났던 후쿠로다니 그룹의 여름방학 합숙을 떠올리고 있는 듯싶었다.

 

  폭풍처럼 지나갔던 여름방학 합숙이 먼 옛이야기가 되었을 때, 그들은 사쿠라신마치의 어느 골목길에서 다시 한 번 조우했다. 그날 아카아시는 진보초에 몰려있는 몇몇 출판사에서 받은 책 꾸러미를 들고 있었고, 스가와라는 오카야마 현이 자랑하는 특산품인 죽세공 바구니를 품에 안고 있었다. 서로의 생업이 달린 물건을 든 채 어색한 인사를 나눴던 두 사람은 이내 너나들이하는 사이가 되었다. 세터였다는 공통점과 서로의 생업에 대한 작은 호기심의 그들의 발걸음을 서로의 가게로 이끌었던 덕분이었다.

 

  스가와라는 본인 입으로 영국 교환학생 시절 위타드(Whittard)에서 마신 홍차를 잊을 수 없어서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찻집을 시작했다고 했다. 다들 하나같이 장난기가 넘치던 카라스노 배구부 출신답게 재치 넘치는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매운 마파두부를 먹고 입가심으로 차를 한 잔 마시면 입안이 개운해져서 마파두부를 한 그릇 더 먹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잖아. 그러나 아카아시는 그 이야기에 중요한 진실이 빠져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가와라가 사루스베리 서사에 놓고 간 차칙(: 대나무로 만든 찻숟가락)을 가져다주기 위해 사쿠라비요리에 갔을 때, 새 주인을 대신해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의 외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 애는 줄곧 내 인생이나 다름없는 찻집을 이어갈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을 쓰고 있었어. 그래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면서까지 여기로 온 거겠지…….’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는 그날 들은 이야기를 조용히 비밀에 부쳤다. 세상 무신경해 보이는 그도 당사자가 하지 않은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떠벌릴 만큼 무신경한 편은 아니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했다. , 다 됐네. 찻집 주인의 짧은 감탄사와 함께 찻잎이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가와라가 차칙으로 잎차를 휘젓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그 정도로 좋은 차를 매번 맨입으로만 받아먹고 있으니 죄송해서 어떡하죠.”

  “그럼 찻값 대신 왜 사루스베리 서사인지 말해줄래?”

  “, 그건……?”

 

  아카아시는 순간 서서히 끓는 물에서 정체모를 위험을 느끼고 탈출한 개구리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몇 년 전 2학년이 된 히나타가 후쿠로다니 그룹 합숙에서 했던 말이 새삼스럽게 다시 떠올랐다. 스가와라 선배는 타고난 목소리가 상냥해서 그런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하지 말아야 될 말까지 줄줄 하게 되더라고요. 히나타의 말이 맞았다. 이 사람은 한가로운 동네의 찻집 주인이 아니라 도쿄 경시청 수사1과의 수사관이 되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쯤 생글생글 웃는 얼굴과 상냥한 목소리를 앞세워 순도 백 퍼센트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경시청의 다크호스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깝다, 거의 다 된 거나 다름없었는데.”

  “보쿠토 씨가 부탁했습니까?”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 가운데 티 스트레이너(: 차 거름망) 속의 옥로 잎이 작은 세계를 진한 연둣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은회색 머리 청년은 능숙한 손길로 티 스트레이너를 빼낸 뒤 두 개의 찻종에 차를 번갈아 따르기 시작했다. 찻종을 향해 흘러내리는 찻물과 함께 어른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그렇긴 하지만 솔직히 나도 궁금했거든. 이름부터 대놓고 벚꽃 마을인 곳에서 꿋꿋하게 백일홍 서사를 고집하는 이유.”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10억 엔을 준다고 해도 사루스베리 서사인 이유를 말하지 않겠다.’고 못박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보쿠토나 쿠로오가 아니라 스가와라 코우시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5천 엔의 찻값이 빚 아닌 빚으로 남아있었다. 결정적으로 10억 엔은 5천 엔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다.

 

  그러니 5천 엔어치의 힌트 정도는, 줘도 괜찮은 게 아닐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책방의 이름을 사루스베리 서사라고 지은 건…….”

 

  잘린 말 뒤에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찻종 둘레를 맴돌며 어디까지 말해야 좋을지를 가늠하던 손가락이 엎어놓았던 책을 다시 뒤집었다. 지근거리에 있던 미도리 사()의 스티키 메모와 만년필을 끌어온 그는 책 속의 한 문장을 필사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꽃말 때문이었습니다.”

 

  만년필이 부지런히 움직인 끝에 한 문장이 나타났다.

 

  「만날 수 없는 벗에게 내 마음을 전해주고 싶다.

 

  꽃말은 잘 모르는데, 검색 좀 해봐도 될까? 이윽고 스마트폰의 자판을 칠 때마다 나는 타다닥거리는 소리가 만년필이 사각거리는 소리와 뒤섞였다. 그러는 새에 또 한 문장이 새 생명을 얻었다.

 

  「잘 있어줘,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게. 그저 같은 하늘 아래에만 머물러 있어줘.

 

  “…….”

 

  아카아시는 그 짧은 감탄사에서 5천 엔어치의 힌트가 그에게 유용했음을 깨달았다. 그 짧은 감탄사와 함께 그가 필사하던 문장도 끝을 맺었다.

 

  「그렇게 기도하고 싶은 순간이다.

 

  “그래서 사쿠라신마치의 사루스베리 서사여야만 했던 거구나.”

  “…….”

 

  세상에는 5천 엔어치의 무언가에서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과 10억 엔어치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5천 엔어치의 미약한 힌트에서 미처 알려주지 않은 것까지 찾아낸 이 사람은 후자라고 봐야 옳을 터였다. 과연 스가와라 코우시는 어디 사는 부엉이 씨와 달리 상상 이상으로 영리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보쿠토 씨나 쿠로오 씨한테 말씀하실 건가요?”

  “글쎄, 나한테도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청량한 목소리로 보류의 뜻을 전한 스가와라가 미도리 사의 스티키 메모를 넘겨다보고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들으면 혼잣말 같기도 하고, 어떻게 들으면 혼잣말이 아닌 것 같기도 한 중얼거림이 찻종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한 덩어리가 되었다.

 

  “역시 차를 보는 눈이 좋은 것 같아, 아카아시.”

  “비싼 차를 알아보는 눈이 있다는 말은 아까도 하셨잖습니까.”

 

  아니, 그래서 좋다는 게 아니야. 테이블 위에 찻종 두 개만 남겨두고 나머지 다구를 정리하던 은회색 머리의 청년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좀처럼 그치지 않는 여우비 소리와 다구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때문에 잘 들릴 것 같지 않던 말은 의외로 귓가에 선명하게 내려앉았다.

 

  “본인에게 어울리는 차를 고르는 눈이 있다는 뜻이었어. 잎차 수급 문제로 시즈오카에 내려갔을 때, 교쿠로노사토 사람들이 그랬거든.”

  “…….”

  “옥로차는 마음의 갈증을 달래기 위해 마시는 차라고.”

 

Chapter 4 : 그 책방의 백일홍

 

  금방 그칠 것 같던 여우비는 제법 거센 빗줄기가 되어있었다. 그 빗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카아시는 시선을 거두고 노트북 화면을 향해 눈을 내리깔았다. 화면 속에서는 구글 재팬의 검색 결과 페이지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백일홍의 꽃말 : 떠나간 벗을 그리워하다

 

  화려한 미사어구도, 쓸데없는 군더더기도 없는 한 줄에 손가락으로 밑줄을 그으며 아카아시는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인자한 노신사에게 사루스베리 서사의 진짜 의미를 간파 당했던 그 날을.

 

  아카아시가 사쿠라신마치 골목길에 있는 1인 출판사의 대표와 안면을 틀 수 있었던 것은 약간의 무지가 부른 오해 때문이었다. 1인 출판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건물 앞에 쌓인 책더미를 본 그는 그 건물을 헌책방 건물이라고 보기 좋게 착각하고 말았다. 그대로 지나쳤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책 한 권을 집어 들어 읽기 시작한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그가 정신없이 일본 민속학의 바다를 부유하고 있을 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카아시를 민속학의 바다에서 건져 올렸다.

 

  “우리 출판사 책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만.”

  “죄송합니다, 헌책방이라고 착각해서 그만…….”

  “책을 소독하겠다고 햇볕에 널어놓았으니 그렇게 착각할 법도 하지. 잠깐 들어오겠나? 1인 출판사를 운영하다 보면 가끔 사람이 그리워지는 법이거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주저하며 들어선 곳은 가히 책의 미로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곳이었다. 빼곡하게 들어찬 책과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교료 원고(: 교정을 완전히 끝낸 원고). 책상 위의 교료 원고 뭉치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까치발로 종종걸음을 치던 아카아시는 이내 제법 깨끗한 책상 앞에 안착할 수 있었다.

 

  “소개가 늦었군. 이와타 쇼인의 이와타 요시히로일세.”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아카아시(赤葦)라면 혹시나나츠모리 쇼텐의?”

  “아버지를 알고 계십니까?”

 

  아카이시는 진심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나나츠모리 쇼텐은 그간 꽤 많은 책을 내왔지만, 카도카와 쇼텐이나 이와나미 문고 같은 거대한 출판사들에 비해 그 존재감이 희미한 곳이었다. 그러니 출판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세타가야 구의 작은 동네에서 그 이름을 듣는 것이 그에게는 적잖이 놀라운 일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잘 알지. 내가 메이쵸 출판사에서 일하던 시절에 만난 자네 아버지는 남들이 안 될 거라고 한 원고만 골라서 보란 듯이 성공시키는 나나츠모리의 편집자였으니까.”

  “그랬습니까.”

  “그러더니 나중에는 누구도 시도해본 일이 없는 크라우드 펀딩 출판을 시도하더군. 자네 아버지한테 많이 배웠다네. 몇 년 전에 그 친구에게 쓸데없이 일찍 철이 든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긴 했지만 이런 데서 만날 줄은…….”

 

  그렇게 말하는 잿빛 머리 노신사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그는 이런 곳에서 지인의 아들을 만난 것이 내심 기뻤는지 아카아시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자네도 나나츠모리 쇼텐에서 일하고 있나?

 

  “아니요, 이 동네에 책방을 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못 보던 입간판이 보이던데, 새로 생겼다는 사루스베리 서사의 주인이 자네였던 모양이군 그래.”

  “, 그렇습니다.”

 

  물 흐르듯 이어진 대답에 노인이 몸을 반쯤 돌려 창문 너머에 시선을 주었다. 그 행동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이 공간에 있는 그 누구도 짐작을 할 수 없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신사는 이내 흥미로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얼굴로 천천히 운을 뗐다.

 

  “자네가 책방을 연 건 떠나간 벗들을 그리워하기 때문인 게지?”

  “그걸 어떻게…….”

  “그게 백일홍의 꽃말이지 않은가.”

 

  초승달처럼 휘어진 노인의 눈 주위로 가늘게 주름이 잡혔다. 가느다란 주름은 노인이 가진 지혜의 원천이라도 되는 듯, 그의 말이 점점 진실에 가까워질 때마다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일찍 철이 들어버린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 상대에게 진심을 털어놓는 것을 주저하곤 한다네. 그런 사람이 진심을 완전히 숨길 수도 내비칠 수도 없을 때, 그만큼 좋은 도구가 또 어디 있겠나?”

 

-

 

  이제는 아예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 되기로 결심한 빗소리가 그를 다시 현실로 데려다놓았다. 아카아시는 마지막으로 떠올렸던 그 말을 조용히 뇌까렸다. 그런 사람이 진심을 완전히 숨길 수도 내비칠 수도 없을 때, 그만큼 좋은 도구는 없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날 1인 출판사의 노신사가 했던 말 중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배구부 3학년들이 후쿠로다니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가장 요란하게 응석을 부린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보쿠토였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런 보쿠토를 능숙하게 진정시켰다.

 

  선배들을 일곱 명이나 떠나보내는 졸업식이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눈시울을 붉혀야 마땅했지만 그날도 아카아시는 끝까지 눈시울을 붉히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본 후쿠로다니의 3학년들이 이런 날까지 침착할 수 있는 게 놀랍다며 혀를 내둘렀었다.

 

  그가 주장이 된 이후의 나날들은 화살보다도 빠르게 지나갔다. 당장 요나카 감독과 타키자와 코치가 뽑은 1, 2학년 레귤러들을 모아 새로운 팀을 구성하는 일이 그의 앞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배구부 주장으로서 인터하이와 봄철 배구 고교 대회라는 길을 정신없이 달리다 멈춰선 어느 날, 아카아시는 아무도 없는 부실 벽에 기대 모래성이 허물어지는 것 마냥 스르륵 주저앉았다. 적막에 휩싸인 그곳에서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감싼 아카아시 케이지는 몇 가지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이 의외로 막내 같았던 주장과 그의 친구에게 많이 의지했다는 것과 줄곧 그들을 추억했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자신도 모르게 억누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런 생각이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한 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무의식이 그 생각을 다그쳤다. 그런 생각은 치기에 불과하다고, 그러니 꿈에서라도 수면 위로 올라올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그 치기는 아카아시의 가장 깊은 그림자가 되었다. 고등학생 때의 치기어린 생각으로서는 누군가에게 전해질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카아시가 책방 창업을 이유로 가업 승계를 유예한 건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자신에게, 그리고 내내 억눌려있던 치기라는 이름의 그림자에게 진심을 털어놓을 기회를 주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책방의 위치는 필연적으로 세타가야 구의 사쿠라신마치가 되어야만 했다. 그가 진심을 전해야 할 상대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찍 철이 들어버린 누군가는 쉽사리 상대에게 진심을 털어놓지 않았다. 아니, 털어놓지 않았다기보다 털어놓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터였다. 결국 이와타 요시히로의 말처럼 아카아시도 결정적인 순간 주저하고 마는사람이던 셈이었다. 그래서 그는 숨길 수도 내비칠 수도 없는 진심을 위해…….

 

  「이 책방, 주변에 백일홍 나무는 한 그루도 없는데 왜 사루스베리(百日紅) 서사야?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

 

  한 그루의 꽃나무를 방해로 내세우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름 내내 떠나간 벗을 그리워하는 사루스베리가 책방의 이름에 스며들었다.

 

  보쿠토는 사루스베리 서사 주변에 백일홍 나무가 한 그루가 없다고 말했지만, 사루스베리 서사 주변아니, 사루스베리 서사 안에는 분명 백일홍 나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쿠토는 영원히 그 백일홍 나무를 찾아내지 못할 운명이었다.

 

  왜냐하면 사루스베리 서사의 백일홍은, 형체를 잃지 않기 위해 꽃이 된 아카아시의 그림자이자 치기어린 진심 그 자체였으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그는 문 닫을 시간이 한참 지났음을 깨닫고 가게 문을 닫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마지막 남은 불 하나를 끄기 전, 벽에 세워두었던 우산을 집어든 아카아시가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비가 내리는 유후인에 갔을 때 우산이 없어 앞뒤 가리지 않고 집어 들었던 우산이었다. 별 생각 없이 우산을 집어든 그에게 기념품 가게 주인이 비를 맞으면 꽃잎이 나타나는 벚꽃 우산이라고 힘주어 말하던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벚꽃이라고 했었는데, 오늘은 꼭 백일홍처럼 보이네.”

 

  혼잣말을 마친 그는 마지막 남은 불 하나를 끈 뒤 지친 손길로 여닫이문을 밀었다. 빗방울이 줄기차게 쏟아지던 그날 밤, 아카아시는 진심이라는 이름의 백일홍을 어깨에 진 채 사쿠라신마치의 길거리를 걸어갔다.

 

Chapter 5 : 이제 길을 만들 수는 없다고 해도

 

  호기롭게 시작되었던 대장부엉이와 붉은발 올빼미의 내기는 의외로 허무하게 끝이 났다.

 

  “내가 졌어! 항복이야!!”

 

  자신만만하게 본인이 이길 것이라 외쳤던 자의 항복 선언과 함께.

 

  “뭐가 말입니까?”

 

  324일을 맞아 서가에 있던 책을 무지개 색 순서대로 정리하고 있던 아카아시가 뒤를 돌아보았다. 보쿠토는 세상 분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쿠로오가 아카아시의 시선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마는 것을 보니 그 역시 아무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스가와라가 차를 마시러 온 날 알게 되었던 진실을 입 밖에 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왜 사루스베리 서사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그냥 내가 진 걸로 할게, 아카아시!”

 

  헤이헤이헤, 아카아시! 소원은!? 금색 눈이 호기심을 가득 담은 채 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소원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던 아카아시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영원 같던 찰나가 지나간 뒤, 그의 손목 근처에서 나풀거리던 니트 소매가 다시 서가를 향해 움직였다.

 

  “, 사주세요.”

  “그게 다야!? 그 정도는 당연히 해줄 수 있다고.”

  “한 달에 한 권씩.”

  “!? 한 달에 한 권씩 사라고?”

  “일단 이번 달은……이 책이 좋겠네요.”

 

  책방 주인이 내민 것은 문제의 인사이드 헤드(インサイドヘッド)였다. 보쿠토는 순순히 아카아시의 손에 들려있던 책을 받아들었다. 아직도 놀리는 거냐며 화를 낼 줄 알았던 보쿠토가 고분고분하게 굴자 놀란 쪽은 오히려 아카아시였다. 그러나 놀라움이 떠오른 얼굴은 보쿠토의 한 마디에 곧 평정을 되찾았다.

 

  “좋아! 그런데 아카아시…….”

  “왜 그러십니까, 보쿠토 씨.”

  “그게…….”

 

  쿠로오 말로는 오늘 보쿠토가 풀이 죽을 만한 일은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하고 싶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퍽 수상했다. 그러던 보쿠토가 갑자기 소리와 함께 합장을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부탁의 전조였다.

 

  “오늘 네코마 OB 애들 몇 명이 놀러 와서 불고기 걸고 시합 하자고 했거든.”

  “……?”

  “그래서 나도 후쿠로다니 OB들을 다 불렀어. 그러니까!”

 

  아아, 그래. 대충 알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아카아시가 짐짓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인간 부엉이 씨는 자신에게 길을 만들어달라고 할 작정인 것이다.

 

  “토스 올려줘, 아카아시!!”

  “오야, 보쿠토 자식.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리에프 녀석 부를 생각 없었는데 불러야겠구?”

 

  솔직히 말하면, 자신은 이제 더 이상 보쿠토에게 길을 만들어줄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 알겠습니다. 불고기가 드시고 싶다, 그 말씀이시죠?”

  “아니, 후쿠로다니의 세터로서 좋은 토스를 올려달라는 거지! 이따가 내가 스트레이트로 쿠로오 녀석의 블록을 뚫어줄 테니까 예전처럼 기뻐해달라고, 아카아시!”

 

  할 수 있는 일은 당신들에게 의지했고, 당신들을 존경했고, 때로는 추억했다는 사실을 억누르고 사는 것뿐이라고 믿었다.

 

  “, . 그렇게 할게요.”

  “아카아시, 귀찮아서 대충 대답하는 거지?”

  “……의외로 잘 알고 계시네요, 보쿠토 씨.”

  “어이, 아카아시. 너 오늘따라 츳코미가 유난히 거침없다? 저 녀석이 저번에 왔을 때 뭐 하나 부수기라도 했어?”

 

  하지만 길을 만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너무해, 아카아시!”

  “농담이었습니다.”

  “!!”

 

  자신은 이미 세상 누구보다 단순한 부엉이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능글거리는 고양이도, 심지어 자기 자신의 치기마저도 포용할 수 있는 백일홍 나무 위 부엉이 둥지를 만들어가고 있었으므로.

 

Fin.

Posted by _Flaneu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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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서는 사루스베리와 백일홍을 자유롭게 혼용하지만, 사실 둘은 같은 걸 가리키는 말입니다.  서사의 이름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일 때는 사루스베리를, 일반명사로서의 백일홍을 가리킬 때는 백일홍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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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모든 사람의 얼굴을 간장형 얼굴, 소스형 얼굴, 또는 소금형 얼굴 따위로 분류할 수 있다면 소년의 얼굴은 문예계 동아리형 얼굴로 분류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의 학창시절은 부활동 한다고? 문예계 동아리겠네? 문예부? 도서부? 그것도 아니면……혹시 고전부?’라는 질문에 아니요, 배구부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일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질문들로 가득했던 몇 년의 시간을 흘려보낸 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스물세 살의 아카아시 케이지는

 

  “어서 오세요, 사루스베리(百日紅) 서사(書肆)(: 서점보다는 작은 규모의 책방)입니다.”

 

  ‘문예계 동아리형 얼굴의 소유자에게 딱 어울릴 법한 일을 하고 있었다.

 

[아카아시 케이지/논커플링] 그 책방에는 백일홍이 없다 上

w. Flaneur


Chapter 1 : 일곱 개의 숲에서 태어난 백일홍

 

  도쿄 도 세타가야 구 사쿠라신마치(桜新町). 누군가는 이 동네를 국민 애니메이션 사자에상의 배경으로 알고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월간 소년 시리우스가 낳은 최고의 히트작 속 요괴 종착역의 배경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현실의 사쿠라신마치에는 사자에 씨도 없으며 요괴를 끌어들이는 벚나무 칠향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이곳을 그렇게 기억했다.

 

  아카아시가 주인으로 있는 사루스베리 서사는 전 국민적 애니메이션과 안 팔리는 만화잡지에서 제일 잘 팔리는 판타지사이를 넘나드는 이 동네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따금 사루스베리 서사를 찾는 후카사와 고등학교 학생들의 말에 따르면, 이 책방의 절묘한 위치는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었다. 일본체육대학을 등지고 한참 걷다가 사쿠라신마치 역까지 얼마나 남았지?’라는 생각을 하며 잠깐 멈춰 서고 마는 바로 그 지점이라고.

 

  아오야마가쿠인에서 평범한 대학생활을 영위하던 아카아시가 이 절묘한 자리에 책방을 열게 된 것은 따지고 보면 그의 부모님 때문이었다. 그가가 스물두 살이었던 일 년 전,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가업인 나나츠모리 쇼텐(森書店) 서점이라고 쓰긴 해도 출판계에서 나름대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출판사였다.을 이어받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꺼냈었다. 지나가듯 했던 말이라고는 하지만, 명령보다는 가볍고 부탁보다는 한없이 무거운 말이었다. 명령도 부탁도 아닌 어떤 것앞에서 아카아시는 이렇게 말했었다.

 

  ‘출판계가 돌아가는 방식도 모르는 채로 출판계에 뛰어들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얼핏 들으면 단칼에 거절하는 것처럼 들렸을 말이어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굳이 아쉬움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물론 서운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카아시의 절충안이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반응과 부풀어 오르는 오해 뒤를 바짝 뒤따랐던 탓이었다. 그러니 출판계의 최전선에 위치한 책방에서 직접 부딪쳐본 후에 출판사를 맡을지 말지를 결정하면 안 될까요.

 

  그러나 하나뿐인 아들이 하루라도 빨리 나나츠모리 쇼텐의 편집자로 들어오길 바랐던 부친은 협상 테이블에 절충안이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런 이유라면 키노쿠니야에서 4년 간 시간제근무를 한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냐.’는 말은 설득의 제1명제가 되었다. 그러나 아카아시는 자신이 내어놓은 타협안을 두고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아카아시가 생각하는 출판의 본령은 독자가 원하는 것을 책으로 구현하는 것인데, 지금의 자신은 독자가 어떤 책을 읽고 싶어 하는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로 나나츠모리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 분명했다. 달리 말하자면, 책방 경영은 후일 자신이 이끌어야 할 나나츠모리를 지키기 위한 나름의 안전장치인 셈이었다.

 

  몇 번의 설득과 회유가 반복된 끝에, 그의 아버지는 책방 운영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아들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말았다. 이 지난한 설득과 회유가 끝난 뒤의 일들은 속전속결의 연속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책방의 위치는 곧장 세타가야 구 사쿠라신마치로 정해졌고, 도로와 집을 이어주는 두세 개의 징검돌이 인상적이었던 빈집은 이내 아카아시의 취향이 묻어나는 책들로 채워졌다. 영업신고 같은 자질구레한 행정절차까지 모두 마치고 책방 문을 열기만을 기다리던 어느 날, 아카아시의 아버지는 걱정 섞인 사족을 덧붙였다.

 

  ‘케이지,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만 혹시라도 책방을 말아ㅁ…아니, 더 이상 운영할 수 없겠다 싶으면 미련 없이 나나츠모리로 들어오렴.’

 

  그 말에 소리 내어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는지, 아니면 작게 고개만 끄덕였는지는 당사자인 아카아시조차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것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제 와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아카아시의 사루스베리 서사는, 그 후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름대로 순조롭게 운영되고 있었으므로.

 

Chapter 2 : 사루스베리 서사에는 백일홍이 없다

 

  사루스베리 서사의 하루는 아카아시가 학교에서 수업을 끝내고 사쿠라신마치로 돌아오는 오후 1시 반부터 주말에는 두세 시간 빠른 11시부터시작된다.

 

  오늘도 잰걸음으로 아오야마가쿠인 대학교의 정문을 빠져나온 아카아시는 오모테산도 역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덴엔토시선과 직결되는 도쿄 메트로 한조몬 선 츄오린칸 행 열차. 그 열차를 타야만 제 시간에 책방 문을 열 수 있었다.

 

  20분간의 짧은 여행 끝에 사쿠라신마치 역에 내린 그는 자신의 가게를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지하철을 타기 전에 비해 한층 느려진 걸음걸이는 이내 미색 외벽의 목조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주인이 온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인지, 건물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 소리가 바람 한 줄기에 부서졌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서사의 문을 연 아카아시는 부지런을 떨며 폴딩도어를 접고는 먼지떨이로 밤새 서가에 쌓였을 먼지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가차 없는 손길 앞에서 햇빛을 품은 먼지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고, 이내 신간 분류 작업이 초보 책방 주인을 향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능숙한 솜씨로 닛판(日販)(: 일본 최대의 출판 도매상. 일본의 출판 도매 시장은 토한과 닛판이 양분하고 있다)에서 주문한 책 몇 권과 출판사와 직거래한 책 두어 권을 서가에 꽂아 넣은 아카아시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제 계산대에 앉아 전날 읽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 사루스베리 서사의 진짜 하루가 시작될 터였다. 이런 하루가 1년 내내 이어져왔으니 오늘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를 것은 없었다. 다른 것이라면 그저…….

 

  “아카아시 오빠!”

  “죄송합니다, 유리에가 책방 가는 날만 기다려서 그런지 신이 나서유리에, 신난 건 이해하지만 그렇게 달려가면 아카아시 군이 놀라잖니.”

  “괜찮습니다. 오랜만입니다, 나카모리 씨. 유리에쨩도 오랜만이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첫 손님의 존재가 매일 다르다는 사실뿐이었다.

 

  “아카아시 오빠, 내가 부탁했던 책은!?”

  “어제 도착했어. 역 앞에 있는 츠타야에 가면 금방 살 수 있었을 텐데, 오래 기다리느라 힘들지 않았어?”

  “츠타야에는 책이 많지만 엄마가 츠타야에서는 이렇게 떠들면 안 된다고 했고……츠타야에는 아카아시 오빠가 없는걸.”

 

  한 달 반 후면 초등학생이 될 나카모리 유리에는 그렇게 말하며 천진하게 웃어보였다. 아카아시가 꽃 이름의 모녀라고 기억하는 나카모리 스미레() (: 제비꽃) 씨와 그녀의 딸 유리에(百合江)(: 이름에 백합이 들어있다)는 그가 지금까지 사루스베리 서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였다. 서사가 문을 연 그날부터 틈틈이 책을 사러 오던 모녀가 아니었다면 나나츠모리 쇼텐은 회사의 새 대표를 몇 년 일찍 받아들여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몇 주 전, 그가 모녀에게 대형 서점인 츠타야를 놔두고 여기까지 오는 이유를 물었을 때 스미레는 말해도 되나 싶은 표정으로 이렇게 답했었다. 유리에가 그러더라고요, 여기서 책을 사면 아카아시 군이 오랫동안 자기하고 친구가 되어줄 것 같다고.

 

  따지고 보면 내가 좋아하는 책방이 망해서 사라질까봐 걱정된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소리가 아닌가. 정말이지 동심의 세계에 사는 어린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카아시는 어린아이의 걱정에 감사를 표할 요량으로 무릎을 굽히고 소녀와 눈을 맞췄다. 아직 완전히 푸름을 되찾지 못한 잔디 위에서 녹색 눈과 개암나무 열매의 색을 닮은 눈이 마주쳤다. 녹안의 책방 주인은 슬쩍 웃으며 꼬마 손님에게 말했다.

 

  “유리에쨩이 그렇게 말해주니 영광이네. 하지만 유리에쨩한테 나는 오빠가 아니라 삼촌 아닐까?”

  “아니야, 아카아시 오빠는 아카아시 오빠야! 엄마가 잘생기면 다 오빠라고 그랬단 말이야.”

 

  아주 잠깐 누구도 깰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훗날 피가 되고 살이 될 명언 앞에서 정작 명언의 창시자인 나카모리 스미레는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감싸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벽에 귀 있고 문에 눈 있다더니…….

 

  “유리에쨩, 책은 안에 있으니까 일단 들어가자. 나카모리 씨, 사쿠라비요리(桜日和)에서 갖다준 차가 아직 남아있으니 안에서 차 한 잔 드시면서 잠깐 쉬다 가세요.”

 

  그렇게 말한 아카아시는 손으로 무릎을 짚고는 그 반동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넘어지지 않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하던 그는 헤이즐넛 색 눈동자가 아주 잠깐 동안 길가의 입간판을 바라봤다는 사실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입간판을 향했던 개암나무색 시선이 참으로 어린아이다운 질문을 몰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카아시 오빠, 여기는 새 둥지야?”

 

  꼬마 손님의 맥락 없는 질문에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은 그는 고개를 돌려 눈앞에 서있는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흰색에 가까운 미색의 외벽, 활짝 열려있는 문, 얌전히 접힌 폴딩도어, 잿빛 벽과 호두나무로 만들어진 서가가 특징인 단층 목조주택. 어디를 둘러봐도 미취학 어린이가 새 둥지라고 느낄 만한 부분은 없었다. 아카아시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유리에에게 되물었다.

 

  “왜 새 둥지라고 생각해?”

  “저쪽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부엉이 오빠랑 닭벼슬 오빠가 이쪽을 계속 쳐다보고 있으니까! 부엉이랑 닭이 좋아하는 곳이라면 당연히 새 둥지잖아.”

 

  난데없는 부엉이와 닭의 등장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아카아시는 길에 세워둔 사루스베리 서사의 입간판을 보고 나서야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유리에의 말대로 입간판에는 뭔가가 매달려있긴 했다. 그러나 거기에 매달려있던 것은 부엉이와 닭이라고 보기에는 많이, 그것도 조금 많이 커다란 금안의 청년과 닭벼슬 머리의 청년이었다.

 

-

 

  교토 사람들은 상대에게서 안에 들어오셔서 잠깐 쉬다 가세요.’라는 말을 들으면 부디 빨리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를 돌려 말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도쿄 사람인 아카아시는 교토 사람들처럼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정말 잠깐만있다 가라는 뜻에서 손님들에게 잠깐 쉬었다 가시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눈앞의 두 도쿄 사람이 생각하는 잠깐은 그가 생각한 잠깐과는 개념이 달라도 한참 다른 모양이었다. ‘잠깐이라는 이름을 달고 시작한 수다가 세 시간이 지나도록 끝날 기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팔락.

 

  손가락 끝에서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보쿠토는 말을 하다 말고 크게 소리쳤다.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자신의 얘기를 제대로 듣고 있지 않다는 방증이라고 여긴 탓이었으리라.

 

  “아카아시! 내 말 듣고 있어!?”

  “, 보쿠토 씨가 또 크로스 치는 법을 까먹어서 보쿠토 씨 팀의 세터가 울기 직전이었다는 부분까지 들었습니다.”

  “오야, 제법인데? 부엉이 자식 조련하는 실력은 여전하구만, 아카아시.”

  “뭐야, 다 듣고 있었냐.”

 

  오른손 약지를 만지작거리던 이의 눈에 비친 것은 원목 테이블에 앉아 세 시간째 끊임없이 떠들고 있는 부엉이 한 마리와 검은 꼬리 고양이 한 마리였다. 잠깐만 있다 가라는 뜻으로 원목 테이블에 내어놓았던 키나코모찌 접시는 그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내 한숨이 따라 나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세 시간은 잠깐이 아니잖습니까.

 

  “야박해, 아카아시!”

  “그래,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츳코미를 넣으면 팔릴 책도 안 팔린다고?”

  “책 한 권 안 사신 분들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네요.”

 

  그리고 책은 나름대로 잘 팔리고 있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아카아시가 나른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보쿠토 코타로와 쿠로오 테츠로. 고등학생 때는 다른 학교에 다니던 두 사람이 사쿠라신마치가 자랑하는 체육 특성화 대학의 동문이 되고 나니 시끄러움도 두 배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두들기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쿠로오 씨는 진학반이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보쿠토 씨가 일본체대 학생 신분으로 여기 앉아있는 건 몇 년째 생각해봐도 정말 놀랍네요.”

  “! 다 들리거든!?”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스파이커인 보쿠토와 블로킹으로 이름을 날리던 쿠로오가 스포츠 추천 전형으로 대학을 갈 거라는 사실은 아카아시를 포함한 모두가 예상한 일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일본체대의 스포츠 추천 입학 제의가 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누구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겨나는 법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문제는 센터시험이었다. 일본체대의 총장 타니가마가 문무양도를 내세워 두 사람에게 센터시험 성적을 요구했던 것이다. 일본체대 자체 본고사는 면제해줄 수 있지만 이쪽도 센터시험 성적을 보고 학생을 받아야 체면이 서니 센터시험에서 최소 편차치 50은 받아와줬으면 한다. 엄밀히 말해 그 요구조건은 진학반이었던 쿠로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매번 시로후쿠의 노트를 빌려 유급 위기를 면해왔던 보쿠토에게만 크나큰 문제였을 뿐.

 

  “너희 매니저가 준 노트 없었으면 저 녀석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걸.”

  “……확실히 그렇죠.”

  “헤이헤이헤! 쿠로오! 지금 그 말, 신종 결투 신청이냐!?”

 

  분명 그때의 보쿠토에게 편차치 50이라는 수치는 이타치야마의 3단 블로킹보다 훨씬 거대하고 공포스러운 장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벽 끝에 선 인간이라도 지옥에서 부처를 만나는 법인지, 쿠로오의 말대로 시로후쿠의 노트가 뜻하지 않은 기적을 선물했다. 그 해 센터시험에 그녀가 찍어놓은 것들이 줄줄이 나온 덕에 보쿠토는 편차치 52로 아슬아슬하게 요구조건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대망의 졸업식 날, 후쿠로다니 배구부원 전원이 그 사건을 시로후쿠의 기적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 그 일이 기적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었다.

 

  그렇게 일본체대에 무사히 안착한 두 사람은 아카아시가 사쿠라신마치에 책방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책방에 출근도장을 찍는 것을 일생일대의 소일거리로 삼았다. 그런 둘을 그는 이렇게 정의하곤 했다. 매출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되는 키나코모찌 털이 2인조.

 

  “거기 둘, 편차치 얘기는 그만 하지 그래!? 센터시험 편차치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

  “, 이것만큼 재미있는 얘기가 어디 있다고.”

  “내가 지금부터 그것보다 백배는 재미있는 얘기 할 거니까 일단 조용히 좀 해봐! 아카아시, 나 궁금한 거 있어!”

  “뭔가요, 보쿠토 씨.”

 

  질문을 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보쿠토는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탕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데없는 충격으로 테이블이 부르르 떨리는 와중에 보쿠토의 목소리가 그 진동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던지, ‘오야, 쿠로오 씨가 그 얘기 기대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는 능글맞은 목소리는 한순간에 지워져버렸다.

 

  “이 책방, 주변에 백일홍 나무는 한 그루도 없는데 왜 사루스베리(百日紅) 서사야?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

 

  그와 동시에 아카아시의 얼굴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침착함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질문, 도와스레(度忘)의 도()가 왜 가벼워 보이냐는 질문만큼 중요한 건가요?”

당연하지, 엄청 중요해!! 그거 생각하다가 어제 밤을 꼬박 새웠다고!!”

 

  ‘단순히 화제를 바꿔서 센터시험 얘기를 잊어버리게 하려는 전략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 문제로 밤을 지새웠다면 그건 그것대로 심각한 문제였다. 도와스레(度忘)의 도()가 가벼워 보이는 이유를 납득시키는 데에도 며칠이 걸렸는데, 이 정도 문제라면 대충 만들어낸 답으로는 보쿠토를 납득시킬 수 없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철없는 부엉이 씨는 본인이 납득할 수 있는 답이 나올 때까지 자신을 들볶을 터였다. 그러나 아카아시에게 그 질문은 왜 하고 많은 곳 중 사쿠라신마치를 택했느냐는 질문만큼이나 받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으며, 동시에 쉽게 답을 줄 수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밤새 생각해봤는데, 사루스베리라는 이름은 혹시……!”

  “……?”

  “사루쿠이(猿杙)가 좋아하는 딸기 친척(ベリー) 아니야!? 잠깐, 그 녀석이 블루베리 좋아했던가!?”

 

  스파이가 상대와 접선하는 것처럼 몸을 잔뜩 움츠리고 한다는 말이 겨우 이런 거라니, 퍽 귀찮게 됐다. 보쿠토가 이런 말장난을 시작하면 거기에 쿠로오가 가세해 걷잡을 수 없이 요란한 만담이 된다는 사실을 아카아시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오야, 블랙베리 아니야?”

  “어쩌면 포이즌베리였을지도!!”

  “어이, 어이. 그건 순정이랑 백만 광년쯤 떨어진 얼굴을 한 네가 츠타야에서 무심코 집어드는 바람에 점원이 당황했던 순정만화 제목이고.”

  “아아, 그랬었나!!”

  “…….”

 

  두 사람이 벌이는 만담의 뼈대가 고로아와세(: 숫자 말장난)였으면 미학적이라고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대책 없는 콤비의 말장난은 타다 노부카츠에서 한 자락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아카아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하나하나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사루쿠이 선배가 좋아하는 건 무즙이고, 애초에 사루스베리(百日紅, 猿滑)는 원숭이()와 미끄러짐()으로 끊어 읽는 게 맞지 않나요.”

  “그렇다는 건……사루스베리 서사 입구에서 내가 미끄러졌으면 하고 그런 이름을 지었다는 말이지, 아카아시!?”

  “보쿠토 씨, 부엉이는 백일홍 나무 가지에 앉아도 안 미끄러지니까 제발 이름에 맞게 행동해주세요.” (: 보쿠토의 한자 木兎는 미미즈쿠, 즉 부엉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

  “, 원숭이가 미끄러지는 나무라면 부엉이도 충분히 미끄러질 수 있다고.”

 

  자신이 삐졌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홱 돌리는 모습을 보니 그가 왜 후쿠로다니의 막내 주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말씀하신 포이즌베리는 미즈시로 세토나의 뇌내 포이즌베리였던 겁니까? 보쿠토 씨의 취향이 그렇게 섬세한 쪽이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미즈시로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긴 한데 어째 나랑 안 어울린다고 말하는 것 같다?”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같은 내용이라면 보쿠토 씨는 미즈시로 세토나보다…….”

 

  서가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 그곳을 빠르게 훑어보던 아카아시가 목표물을 발견하고는 긴 손가락을 뻗어 책을 빼냈다. 유리에가 부탁했을 때 혹시나 해서 몇 권 더 주문해뒀던 그 책이 이 순간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거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었다.

 

  “이쪽이랑 잘 맞겠죠.”

  “이거 그거 아니야? 인사이드 헤드(インサイドヘッド)(: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일본 개봉 당시 명칭)? 크하하하하하하하! 어이, 보쿠토. 이거 완전 널 위한 책인데!?”

 

  여자아이의 머릿속에 귀여운 캐릭터들이 들어찬 표지를 본 쿠로오는 배를 부여잡고 웃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는 와중에도 한 마디 하는 것은 잊지 않은 채였다. 요로코비(기쁨이)크흡카나시미(슬픔이)랑 결혼하면……아이고 배야……! 너 태어나는 거 아니야?

 

  “!! 그런 거 알 게 뭐야!! 그래서 아카아시, 왜 사루스베리 서사인지는 언제 가르쳐줄 거야?”

 

  이 난장판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그런 생각에 잠겨있던 아카아시는 자신을 부르는 보쿠토의 목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미묘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말을 고르던 그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잊어버리셨을 줄 알았는데, 용케도 안 잊어버리셨네요. 하지만 말 안 해드릴 겁니다. 사업 상 비밀이니까요.”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말 안 할 거야?”

  “보쿠토 씨가 분위기 파악 못하는 미스터리 마니아 주최 밀실살인 게임에서 살아남아 받은 10억 엔을 저한테 전부 주신대도 말 안 할 겁니다.”

 

  단호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보쿠토는 마지막 하나 남은 키나코모찌의 껍질을 맹렬하게 뜯으며 가늘게 실눈을 떴다. 그리고 정확히 5초 후, 가늘게 뜬 실눈은 삐죽거리는 입을 새 친구로 맞아들였다.

 

  “, 됐어! 안 가르쳐준다 이거지!? 그런 것쯤은 내가 알아내면 그만이야. 내기하자, 아카아시!!”

  “내기요?”

  “그래! 내가 알아내면 토스 100개 올려줘!!”

  “보쿠토 씨가 끝까지 알아내지 못하시면 보쿠토 씨는 저한테 뭘 해주실 겁니까?”

  “? 내가 뭘 해줘야 하는 거야?”

 

  세상 천지에 흩어진 당당함을 다 긁어온 것 같은 태도가 아카아시의 한마디에 얼빠진 부엉이 같은 태도로 돌변했다. 그 한 명만을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얼빠진 얼굴이 어서 답을 알려달라는 듯 아카아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부엉이 조련사는 끝까지 친절함을 잃지 않은 채로 설명을 시작했다. 안 그러면 내기가 성립하지 않으니까요.

 

  “좋아! 어차피 안 질 거니까!! 내가 뭘 해주면 되는데?”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네요. 기한은 둘 중 한 명이 포기할 때까지로 하면 될까요?”

  “그거 괜찮네, 어차피 내가 금방 알아낼 테니까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지만! 어이, 쿠로오! 그만 웃으라고!! 아카아시, 우리 먼저 갈게!!”

 

  보쿠토의 마지막 인사는 사루스베리 서사와 인연을 맺었던 그 어떤 손님의 인사보다도 요란했다. 그 요란한 인사와 함께 붉은발 올빼미(: アカアシモリフクロウ/아카아시모리후쿠로)에게는 영 달갑지 않은 내기가 시작되었다.

 

-

 

  “보쿠토 씨, 또 뭘 잊어버리고 가신 ㄱ…, 죄송합니다. 이와타 씨.”

  “찾던 사람이 아니라 미안하구만.”

  “아닙니다. 여행에서 예정보다 일찍 돌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풍경 소리가 남색 밤하늘을 흔들었다. 노트를 펴놓고 결산에 열중하던 아카아시는 제멋대로 보쿠토라고 착각했던 사람을 향해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와타 쇼인(岩田書院)의 대표 이와타 요시히로가 책방의 간접조명 아래에서 사과를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한 달에 네다섯 권의 책을 내는 1인 출판사 이와타 쇼인은 아카아시의 사루스베리 서사처럼 세타가야 사쿠라신마치의 한적한 주택가에 숨어있었다. 그리고 메이쵸 출판사(名著出版)에서 편집자로 일하다 일신상의 사정으로 이 1인 출판사를 차렸다는 이와타 요시히로는, 아카아시의 아버지와도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팔짱을 낀 채 문간에 기대있던 잿빛 머리의 노인이 기울어져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입을 열었다.

 

  “자네에게 줄 게 있어서 몇 시간 전에 찾아왔더니 자네가 한담을 하느라 바쁜 것 같지 뭔가. 그래서 그냥 돌아왔네. 그나저나 친구들이 온 모양이던데.”

  “어르신께 폐를 끼쳤습니다. 그 두 사람을한 살 위의 손윗사람을 친구로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친구라고 해 두겠습니다.”

  “그 어르신이라는 말 좀 안 쓰면 안 되겠나? 자네가 그렇게 부를 때마다 정말 뒷방 늙은이가 된 기분이란 말일세.”

 

  지켜야 할 예의라는 게 있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새파란 청년이 입바른 소리를 덧붙이자 노인은 유쾌하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자네, 어떤 의미로는 정말 대쪽 같군 그래.

 

  “자네의 서사에 백일홍을 피운 건, 역시 그 친구들인 게지?”

  “……글쎄요, 어떨 것 같으십니까.”

 

  웃고 있는 얼굴과 대비되는 질문은 촌철에 가까웠다. 아카아시는 희미하게 웃어보였을 뿐, 애써 질문에 대답하려 들지 않았다. 진실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으니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여행을 갔다 온 사이에 어른을 놀리는 데에도 도가 텄구만.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줄 게 있었지.”

 

  노인은 팔짱을 오래 끼고 있던 탓에 팔이 시큰거리는 모양이었다. 양 팔을 아래위로 가볍게 턴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아카아시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자신보다 두세 배는 많은 나날을 산 이에게서 받은 책을 내려다보았다. 일본어가 아닌 생경한 언어, 문고판도 신서판도 아닌 특이한 판형이 눈에 띄는 하늘색 책. 그러나 이 책에 쓰인 생경한 언어는 아카아시도 약간이나마 알고 있는 언어였다.

 

  “한국어로 쓰인 책입니까?”

  “맞네, 여행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사온 책이지. 볼일은 다 끝났으니 이제 가봐야겠군.”

 

  노인은 아카아시가 아오야마가쿠인에서 교양 수업으로 한국어를 조금이나마 배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신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던 지나가는 말 한마디를 내내 기억에 담아뒀다는 사실에 그는 존경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걸 왜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당연하다는 듯 이어진 질문에, 노인이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출입문을 향해 돌아섰다.

 

  “자네에게 필요할 것 같았거든, 그 책이.”


To be continued.


-


1. 사루스베리 서사는 <빙과>의 자릿수 올라가는 4대 명가에서 따온 것이 맞습니다.


2. 안 팔리는 만화잡지에서 제일 잘 팔리는 판타지는 (듀라라라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유명한) 야스다 스즈히토의 '벚꽃사중주(요자쿠라 콰르텟)'입니다.  월간 소년 시리우스를 월간 벚꽃사중주로 만든 그 만화...


3. 아카아시를 MARCH(메이지/아오야마가쿠인/릿쿄/주오/호세이) 중 아오야마가쿠인으로 보내버린 건 아오야마가쿠인 학생들 특유의 무미건조함 때문이었습니다.  어쩐지 잘 어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라면 기분 탓일까요... 덧붙여 국제정경과 영미문을 제외한 아오가쿠의 편차치는 70 초반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아카아시는 센터시험 편차치 75를 받아놓고 영미문이나 국제정경 대신 종합문화정책학부로 갔다는 뇌내설정이 있습니다.


4. '나나츠모리'라는 이름은 시민출판 방식을 고수하는 소형 출판사 '나나츠모리 쇼칸'과 코엔지의 카페 '나나츠모리'에서 가져왔습니다.  코엔지의 나나츠모리는 카페의 상징이 마침 부엉이기도 하네요.


5. 닛판(일본출판판매)과 토한(동경출판판매)은 출판 도매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두 회사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정초 부도를 맞은 송인서적과 북센 같은 회사인 셈입니다.  보통 출판사도 서점도 이 두 회사를 통해 책을 공급하고 공급받는데 (요즘은 작은 책방과 작은 출판사가 직거래를 시도하는 경우도 꽤 있지만요) 설정 상 사루스베리 서사의 공급률은 대략 72%입니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서점이나 출판사가 닛판/토한과 거래를 트려면 필요한 돈이 50만엔이라는 얘기가... (먼산) 아카아시 돈 많구나...


6. 보쿠토의 말장난은 이런 식입니다.  사루스베리(百日紅, 猿滑り)는 원숭이가(猿) 미끄러진다(滑り)라고 끊어읽어야 하는데, 사루쿠이(猿)가 사랑하는('s) 딸기 친척들(ベリー, berry)로 끊어 읽는 그런... 대장부엉이의 영어실력 이대로 괜찮은가 () 이 말장난의 뒤를 이어 블랙베리와 미즈시로 세토나의 <뇌내 포이즌베리>가 등장하는 것도 다 그런 맥락입니다.


7. 아카아시가 '분위기 파악 못하는 미스터리 마니아 주최 밀실살인 게임' 같은 얘기를 한 건 그때 읽고 있던 책이 요네자와 호노부의 <인사이트 밀(Incite Mill)>이었기 때문입니다.  10억 엔 얘기가 나오는 걸 보니 (스포)가 (스포)하는 후반부였던 셈이네요.


8. 이와타 쇼인은 실제 세타가야 구의 어느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후카사와 고등학교도 정말 있는 학교랍니다, 놀랍게도...) 대표의 이름은 아주 약간 수정을 거쳤지만요... 주로 내는 책은 일본 민속학에 관한 책이라고 해요.

Posted by _Flaneur_
,

- 오랜 트친벗의 (honjaduckjil on Twitter) 귀여운 썰을 제가 본격적으로 망치는 이야기입니다.  분명 존잘님의 썰은 귀엽고 또 귀여운 내용이었지만 어느새 밑도끝도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네.. 그렇습니다.

- 미야기에서 의도치 않은 디저트 파티를 결성하게 된 두 사람의 미묘한 이야기입니다.

- 하지만 커플링 아닙니다 (단호)

- 글갈피에도 등장하는 구절은 요네자와 호노부, <쿠드랴프카의 차례> 411쪽을 향한 오마주입니다.  좋아해요, 이 부분.


  검지로 홈 버튼을 누르자 까맣게 죽어있던 화면이 밝게 살아났다.  22, 오후 417.  그는 슬슬 이야기를 꺼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헤드폰을 벗어 목덜미에 걸었다.  그러고 나서 카라스노의 이성츠키시마 케이는, 체육관에 모여 있던 카라스노 배구부원들에게 폭탄과도 같은 한마디를 던졌다.

 

  “오늘은 부 활동 쉬겠습니다.”

 

[츠키시마 케이/논커플링] 당신이 모르는 딸기 쇼트케이크의 몇 가지 의미

w. Flaneur


Chapter 1 : 무기력한 이의 폭탄선언

 

  누군가는 사랑을 폭풍도 흔들지 못하는 마음에 몰아치는 빗물 한 방울이라고 했다.  따지고 보면 츠키시마의 입에서 나온 촌철살인과도 같은 한마디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단조로운 어조의 그 한마디는 날지 못하는 까마귀는 오명으로도 흔들지 못했던 카라스노 배구부원들을 강타하고 지나갔으니까.  그리고 그 한마디가 던진 충격 속에서 카라스노 배구부의 유일한 상식인, 사와무라 다이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유는?”

  “일신(一身, いっしん)상의 사정이에요.”

 

  세상의 상식대로라면 일신상의 사정이라는 말에 토를 달아야 하는 것은 다이치였음에도 불구하고, 난데없이 그 단어에 반응한 것은 주황머리 소년이었다.  문제의 주황머리 소년 히나타 쇼요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카게야마, 메이지 유신(維新, いしん)의 사정이라니 츠키시마 녀석의 사정이란 거 완전 엄청난 거 아니야!?”

  “메이지 유신에는 촉음 안 들어가거든, 히나타 이 멍청아!!”

  “뭐야, 너 한자는 꽤 한다 그거냐!?”

  “네놈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거든!?”

  “, .  그만할 때도 됐지?”

 

  검은머리와 주황머리 소년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다이치는 두 사람의 머리를 양쪽으로 밀어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흘러나온 목소리는 자못 엄격해서, 츠키시마는 순간 위압감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일신상의 사정이라고 해도 그런 식으로 넘어가는 건 곤란해.  네 선배로서는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배구부 주장으로서는 타케다 선생님께서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야 하거든.”

  “…….”

 

  츠키시마는 별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다이치 씨, 저쪽에서 얘기하고 싶은데요그 목소리가 퍽 얄미웠던 탓에 히나타와 카게야마는 츠키시마를 향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고함을 내질렀지만, 그는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체육관 구석으로 발을 옮겼다.

 

  “오늘이 형 생일이라서요.  회사에 있는 형에게 케이크만 사서 전해주고 올 겁니다.”

  “좋은 일인데 뭐하러 굳이 일신상의 사정이라고 뭉뚱그려 말해.  그런 거라면 다녀와.  부활동을 쉬는 건 불가능하지만 한 시간 정도는 줄 테니까.  타케다 선생님한테는 내가 적당히 말해둘게,”

  “……감사합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렇게 말하며 다이치는 츠키시마의 등을 아프지 않게 내리쳤다.  츠키시마는 아픔이 가시지 않은 등에서 얼얼함을 떨쳐내려고 노력하며 헤드폰을 눌러썼다.  가야 할 곳도, 사야 할 것도 정해져있으니 한 시간 정도면 학교까지 돌아오기에도 충분한 시간일 터였다.

 

Chapter 2 : 살다 보면 쓸데없는 일로 불타오르고 마는 순간이 있다

 

  터벅터벅 걷던 발걸음이 어느 가정집 앞에서 멈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발걸음은 가정집을 개조한 가게 앞에서 멈췄다.  주인을 닮아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발걸음이 향한 곳은 카라스노 고등학교 정문, 사카노시타 상점, 그리고 주택가 사이로 구불구불 뻗은 골목길을 지나야 보이는, 주택가와 번화가가 뒤섞이는 곳의 상징이 된 한 케이크 가게 앞이었다.  그 발걸음의 주인인 츠키시마 케이는 고개를 들어 낮은 담장 앞을 지키고 선 입간판을 쳐다보았다.  카페 카우벨.  동경제과학교 출신 사장이 만드는 쇼트케이크와 어떤 애니메이션 캐릭터 애석하게도 그 캐릭터가 공룡이 아니었던 탓에 츠키시마는 누구보다 빠르게 그것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다.모양의 슈크림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어서 오세요.”

 

  잔디밭 사이로 고개를 내민 돌들을 밟고 지나가자,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문이 그를 맞았다.  츠키시마가 문을 열어젖히자 달랑달랑 부서지는 종소리와 종업원의 맑은 목소리가 뒤섞여 밀려왔다.  그 소리가 빠르게 흩어진 자리를 설탕 냄새와 철모르는 과일 냄새가 부지런히 채우기 시작했다.

 

  “주문하시겠어요?”

 

  살가운 목소리는 조금 전 인사를 건넬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새로 들어온 손님은 자신밖에 없었으니 저 목소리는 분명 자신을 향한 것이리라.  쇼케이스에 두었던 시선을 계산대 뒤의 종업원에게로 옮긴 츠키시마는 배구부원들에게 다 써버리고 얼마 남지 않은 상냥함을 긁어모아 입을 열었다.  아아, 나중에요.

 

  “주문하실 때 불러주세요.”

 

  변함없이 상냥한 목소리를 끝으로 다시 바라본 쇼케이스에는 현실과 동떨어진 또 하나의 세계가 있었다.  시끄러운 바보 콤비도, 전국대회를 향해 남김없이 자신을 불태우는 배구부 선배들도 없는 달콤한 세계.  그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티라미수 몇 개와 블루베리 쇼트케이크, 초코 쇼트케이크, 그리고 그가 사러 온 딸기 쇼트ㅋ…….

 

  “…….”

 

  놀랍게도 그곳에 딸기 쇼트케이크는 없었다.  딸기 쇼트케이크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Sold out’이라는 말로 반가움을 표시하는 작은 이름표뿐이었다.  이 일련의 사태는 오늘이 22(: 일본에서 매달 22일은 쇼트케이크의 날’)이라는 것을 잊은 탓에 일어난 대참사였다.  이런 날 케이크 가게에 딸기 쇼트케이크가 남아있기를 바라는 것은 자신이 히나타 못지않은 배구 바보가 되는 날을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쓸데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나.’

 

  그렇게 생각하며 츠키시마는 옆 쇼케이스를 넘겨다보았다.  고양이 같기도 하고, 자세히 보면 친칠라 같기도 한 캐릭터 모양의 슈크림이 일렬종대로 늘어서있었다.  딸기 쇼트케이크는 다 팔렸다 해도 저 중에는 분명 딸기 슈크림이 있을 터였다.  그런 생각으로 이름표를 하나하나 훑어 내려가는 그의 귀에 방울이 흔들리는 소리와 종업원의 어서 오세요.’라는 외침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커스터드, 녹차, 초콜릿, 캐러멜, 피치, 마롱……그리고 딸기.  딸기 슈크림이 남아있음을 알았으니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츠키시마는 딸기 슈크림에 시선을 고정한 채 종업원을 불렀다.

 

  “저기.”

 

  분명 그때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딸기 슈크림 하나 주세요.”

  “토토로 슈크림 종류별로 하나씩 주세요.”

 

  찾는 사람은 둘인데 딸기 슈크림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던 그때까지는, ‘딸기 쇼트케이크를 먹고 여유롭게 학교로 돌아간다.’는 츠키시마 케이의 계획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

 

  카페 카우벨에서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던 날, 여자는 서비스업의 생명이 무엇이냐는 사장의 질문에 친절이라고 답했었다.  ‘틀에 박힌 대답이군요.’라고 중얼거리던 나이 지긋한 사장은 그녀의 우려와 달리 흔쾌히 그녀를 채용했다.  그리고 사장은 축하한다는 말 뒤에 이런 말을 덧붙였었다.

 

  ‘서비스업의 생명은 친절이 맞지만, 실전에서 필요한 건 싸움을 말리는 능력일 거예요.’

 

  그때의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비스업은 손님을 상대로 물건이나 서비스를 파는 일이지 남의 싸움에 뛰어들어 그 싸움을 말리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누나, 제가 더 잘생겼으니까 제가 가져가는 게 맞지 않아요!?”

  “그런 논리면 제 키가 더 크니 제가 가져가는 게 맞겠네요.”

 

  그녀는 서비스업 종사자에게 싸움을 말리는 능력이 왜 필요한지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아하하, 글쎄요……전 잘…….”

 

  먹을 거 하나를 두고 유치하게 싸우는 덩치 산만한 고등학생들을 말리기란 철옹성 같은 손님의 지갑을 여는 일보다 백배는 어려웠으므로.

 

-

 

  바보 같다.  그 말은 츠키시마 케이가 쓸데없이 불타오르는 녀석들에 대해 평할 때 즐겨 쓰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녀석들과 마주친 순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비아냥대는 것은 그의 오래된 취미이기도 했다.  그가 그 오래된 취미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쓸데없이 열정을 쏟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장 내일이 없을 것처럼 자신을 불태워도 남는 것은 대입 자기소개서 속 한 줄, 혹은 혼자 볼 일기장에나 박제될 추억뿐이다.  그래서 츠키시마는 자신이 살아가는 동안 쓸데없이 불타오르는 일은 없을 거라고 감히 확신했었다.

 

  “내가 이것 때문에 할아버지 제사 있다고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부활동을 빠져나왔다고!!”

 

  그러나 그는 이 유치한 말싸움 도중에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 그러세요?  할아버님께서 손주의 만행을 참다못해 관짝을 부수고 나오시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자신 같은 사람도 살다 보면 쓸데없이 불타오르고 마는 순간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우리 할아버지는 그러실 분이 아니거든요.  딸기소년, 우리 할아버지 만난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말하면 곤란하다고.”

 

  츠키시마를 딸기소년이라고 칭한 남자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일념을 담아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계산대 앞에서 지리적 우위를 차지해 보겠다는 듯 머리를 들이밀어 츠키시마의 얼굴을 밀어내는 것도 잊지 않은 채였다.  츠키시마는 턱밑까지 다가온 분홍색 머리카락을 검지로 꾹꾹 밀어내며 이죽거렸다.  평소와 다르게 절대 물러서고 싶지 않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딸기소년입니까?  딸기머리 씨.  초등학생도 부끄러워서 써먹지 못할 이유를 대면서 소유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게.”

  “있잖아, 미나미.  잘생긴 애들 둘이서 싸우니까 싸우는 걸로 안 보이지 않아?”

  “말이나 된다ㄱ…….”

 

  작은 가게 한구석에서 들려온 속살거림만 아니었다면 자신은 분명 끝까지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상황을 해석하는 방식과 다른 사람들이 상황을 해석하는 방식이 판이하게 다르다면 문제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그 속살거림이 개입한 순간, 이미 이 상황은 슈크림의 소유권 문제가 아니라 체면치레 문제가 되어있었다.

 

  “…….”

 

  그리고 이런 문제에서 지는 것은 대체로 덜 뻔뻔한 쪽이었고, 츠키시마 케이는 유감스럽게도 그 덜 뻔뻔한 쪽에 속했다.  츠키시마가 혀를 차며 한발 물러서자 신이 난 건 분홍머리 소년 쪽이었다.  흰 블레이저가 인상적인 분홍머리 소년, 하나마키 타카히로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계산대를 향해 외쳤다.

 

  “어이, 딸기소년.  벌써 포기하는 거야?”

  “…….”

  “누나, 계산이요.”

 

  종업원은 분홍머리 소년과 안면이 있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종업원이 소년에게 핀잔을 놓는 것을 지켜보던 츠키시마는 그들과 멀찍이 떨어져 쇼케이스 앞에 자리를 잡았다.  가까이 있어봤자 다른 사람들에게 얘깃거리를 던져주는 것밖에 더 되겠나 싶었던 것이다.  달리 할 일이 없어 물끄러미 바라본 쇼케이스 안에는 여전히 달콤한 세계가 건재하고 있었지만 그는 딸기 슈크림을 대체할 것을 고르고 싶지 않았다.  딸기 쇼트케이크, 그리고 딸기 슈크림의 부재를 깨달은 순간 대체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완벽하게 사라졌던 탓이었다.

 

  ‘, 딱히 딸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까.’

 

  솔직히 말해 그에게 딸기는 달콤함보다 신맛이 오래 남는, 뒷맛이 좋지 않은 과일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언젠가부터 썩 좋아하지 않는 딸기 쇼트케이크를 습관적으로 찾고 있었다.  이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분명 존재할 텐데, 이제는 그 이유조차 희미해져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묻어버리면 그만이라고.  츠키시마는 작게 중얼거리며 헤드폰을 다시 눌러썼다.  이곳에 온 목적이 사라졌으니 더 남아있을 이유도 없었다.  주장인 다이치는 그가 일찍 돌아온 것을 의아하게 여겨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겠지만, 형이 자리에 없어 만나지 못했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그를 불러 세웠다.

 

  “딸기소년, 딸기 스무디 먹고 가지 그래?  딸기, 좋아하잖아?”

 

  돌아본 곳에서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유치한 말싸움의 상대가 쟁반을 들고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웃는 얼굴에 침을 뱉는다는 건 상식인으로서는 차마 못할 짓이지만, 츠키시마 케이는 이런 구석에서 상식인의 범주를 조금 아주 조금벗어나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삐딱선을 탄 이의 대답은 제법 모가 나있었다.

 

  “제가 왜요.”

  “빈손으로 그냥 가기 아쉽잖아, 날씨도 좋은데.  부활동 빠지기에 딱 좋은 날씨라고.”

 

  봐, 저기.

 

  하나마키가 가리킨 곳은 폴딩도어를 열어놓은 창가 자리였다.  폴딩도어 너머의 하늘이 눈부실 정도로 푸르고 선명해서 츠키시마는 잠시 눈을 찡그려야만 했다.  몇 번의 찡그림 속에서 일찍 돌아갔을 때 마주하게 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니 배구부의 바보 콤비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눈을 찡그리지 않아도 하늘이 온전하게 보이기 시작할 때쯤, 츠키시마는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마따나 바보 콤비에게 시달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울 정도로 좋은 날이었다.  그리고 그런 날 바보 콤비와 미심쩍은 사람이 사주는 딸기 스무디를 두고 고민해야 한다면 자신의 선택은 고민할 것도 없이 후자였다.

 

Chapter 3 : 거울 속의 나를 향해 화해를

 

  츠키시마 케이는 머리가 좋았다.  그의 담임교사는 운동부인데도 성적이 높은 편이네, 츠키시마 군.’이라고 말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배구부 선배들은 그를 향해 영리한 블로킹을 한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 좋은 머리가 남자 고등학생 두 명의 방과 후 티타임은 남이 보기에 어딘가 우스꽝스럽지 않겠냐고 외치고 있었음에도 츠키시마는 떫은 표정으로 딸기 스무디를 마시고 있었다.

 

  “아니, 앉아서 먹고 싶으면 음료를 시켜야 한다는데 오늘은 영 내키질 않아서 말이야.  그래서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는 셈치고 널 써먹은 거지.”

 

  그것도 꿈에 나올까 몸서리치게 되는 유치한 말싸움의 상대 앞에서.

 

  “고객 친화적이지도 않은 테이블에 몸을 욱여넣으려고 생판 남을 이용하다니 아까부터 생각한 거지만 정말 뻔뻔하네요, 그쪽.”

  “나도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너 사람 신경 긁는 말 되게 잘한다.  , 너만큼이나 사랑 신경 긁어대는 녀석을 알고 있어서 딱히 화가 나는 건 아니지만.”

 

  남자 고등학생에게 친화적이지 못한 테이블 밖으로 다리를 쭉 뻗은 하나마키는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맞은편에서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빨대를 씹고 있는 노란 머리 소년은 그의 친구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물론 오이카와가 초등학생을 떠오르게 하는 것에 비해 이 소년은 애늙은이를 떠오르게 한다는 사실이 조금 다르긴 했다.  이런 애늙은이 같은 녀석도 딸기 쇼트케이크 같은 걸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하나마키는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잠깐 만났다 이내 다시 갈라지는 물줄기 같은 사이에 어울릴 법한 가벼운 질문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딸기쇼트케이크를 좋아하는 이유가 뭐야?”

 

  그러나 그 가벼운 질문이 내내 못마땅함으로 무장하고 있던 소년의 얼굴에 균열을 내고 말았다.  애늙은이 같던 얼굴 사이로 아주 잠깐 열일곱 소년의 얼굴이 나타났다 황급히 모습을 감췄다.

 

  “넘겨짚기가 심하시네요.”

  “넘겨짚기 아닌데?  너 말이야, 아까부터 다 팔린 딸기 쇼트케이크 쪽만 계속 쳐다보고 있잖아.  게다가 다른 과일이 올라간 쇼트케이크는 널려있는데 넌 그걸 거들떠보지도 않고 딸기 슈크림을 골랐다고.  그건 딸기쇼트케이크를 좋아한다는 증거 아니겠어?”

  “…….”

 

  하나마키는 긴 추론을 늘어놓으며 신중하게 토토로 슈크림의 귀 한 쪽을 떼어냈다.  대답을 듣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자세였다.  저 정도로 부담 없는 질문 태도라면 대답해야 하는 쪽도 깊게 생각할 필요 없이 가벼운 대답을 들려주면 그뿐이었다.  그러나 츠키시마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릴 때 엄마가 자주 만들어줬다거나 친구와 굳이 예를 들어야 한다면 야마구치 같은자주 먹었다는 흔해빠진 대답보다도 먼저 떠오른 희미한 기억이 있던 탓이었다.

 

  그는 턱을 괴고 폴딩도어 너머의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억의 책 속에 잠들어있던 빛바랜 기억이 딸기 슈크림의 힘을 빌려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

 

  그때의 내가 초등학생이었는지 중학생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때는 이미 그 일이 일어난 뒤였고, 형은 진작 고등학교를 졸업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는 사실만이 기억에 남아있다.  형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센다이에 있는 어느 회사에 취직해 가족 모두가 형의 얼굴을 잊을 만하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형이 집에 돌아오지 않는 시간에 비례해 형과 내 사이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그 일이후 얽힌 매듭은 전혀 풀리지 않은 채였다.

 

  그날은 사회초년생이 된 형이 첫 월급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이었다.  물론 형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계단을 뛰어내려오던 예전의츠키시마 케이는 이제 그곳에 없었다.  점심 식사 시간,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라도 된 표정을 하고 계단을 내려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나를 보며 형은 입을 달싹였다.

 

  “케이, 점심 먹고 케이크 먹으러 갈래?  어릴 때부터 디저트 좋아했잖아.  첫 월급 받은 기념으로 케이한테 뭐라도 사주고 싶은데.”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그 미소를 보니 씹고 있던 밥알이 단번에 모래알로 변하는 기분이었다.  3년 내내 거짓말이나 하게 만든 동생이 뭐가 그리 좋다고.  그러나 형제의 사이가 소원해진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엄마에게는 그것이 절호의 기회처럼 여겨진 모양이었다.

 

  “그래, 케이.  요즘은 밥 먹을 때 빼고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잖니.  바깥바람이라도 쐰다고 생각하고 다녀오렴.”

 

  그리고 나는 가기 싫어 죽겠는데도 마지못해 따라나서는 것처럼 부루퉁한 목소리로 대답했던 것 같다.

 

  “……알겠어.”

 

  목조주택만이 가득한 골목길 어딘가.  형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카페 카우벨까지 가는 길은 제법 멀었다.  아니, 사실 카페까지의 거리는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의외로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매 순간 내 발밑을 가시방석으로 만드는 사람을 동행으로 삼으면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도 오키나와에서 삿포로까지의 거리만큼이나 길다고 착각하기 쉬우니 말이다.

 

  사이가 틀어지기 전이라면 분명 형과 팔짱을 끼거나 형의 팔에 매달려서 갔을 길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형과 멀찍이 떨어져서 길을 걸었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지만 목소리만은 선명하게 들릴 그런 거리.  그게 내가 형을 상대로 유지하고 있는 마음의 거리였으리라.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리는 그 거리에서 형은 나지막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있잖아, 케이.”

  “…….”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그때, 누군가는 상대에게 손을 내밀어야만 풀 수 있는 매듭이 우리 사이에 있었다.  하지만 나나 형은 매듭을 풀기 위해 서로에게 손을 뻗을 용기가 없었고, 간신히 서로에게 가 닿은 목소리는 매듭을 단칼에 잘라내지도 못한 채 그렇게 흩어지고 말았다.

 

  카페 카우벨, 케이크 쇼케이스 앞.

 

  “죄송합니다, 지금은 딸기 쇼트케이크밖에…….”

 

  꼬인 것이 나와 형 사이의 매듭뿐인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연신 사과를 하는 종업원을 보며 형은 본인이 더 미안해했다.  지나치게 미안해하는 그 표정 옆에 곤란하게 만들어서 죄송하다는 말이 따라붙었다.  사회생활에 익숙해진다는 말은 저런 것을 보고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내 잘못도 아닌 일을 내가 잘못한 일이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  그 사람에게 한참을 미안해하던 형은 걱정스러운 낯빛을 하고 나를 돌아보았다.  분명 선택권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미안해하고 있는 거겠지.

 

  “케이, 딸기 쇼트케이크만 남았다는데……괜찮아?”

 

  솔직히 말하면 괜찮지 않았다.  달콤함이 사라지고 나면 신맛만 한가득 그러안은 채 포크를 내려놓아야 하는 딸기 쇼트케이크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씁쓸하기만 한 티라미수가 차라리 나았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대답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 괜찮아. 딸기 좋아하니까.”

  “그래? 다행이다. 나도 딸기 좋아하거든.”

 

  거울이 없어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 내가 형에게 보여준 것은, 거짓을 숨기기 위해 애써 그려낸 억지 미소가 아니었을까.

 

-

 

  그 뒤에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딸기 쇼트케이크를 어떻게 먹어치웠는지, 형과 무슨 얘기를 했는지, 그 전에 얘기를 하긴 한 건지를 정확히 서술하는 것은 평생 불가능한 일이다.  과거의 사실이란 것은 시간의 등쌀에 떠밀려 끊임없이 제 모습을 바꾸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시간의 등쌀에 시달리면서도 끝내 제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

 

  내가 형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것.

 

  보통 거짓말에 복잡다단한 이유가 동반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거짓말이란 건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상황을 모면한다.’는 단순하고도 명료한 목적만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딸기 쇼트케이크를 좋아한다고 거짓을 말한 데에는 그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 이상의 복잡다단한 이유가 있었다.

 

  나는 형을 괴롭게 한 자신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형이 카라스노 배구부에 들어갔을 때, 나는 그 보잘것없는 부 활동이 형의 전부가 되리라고 기대했다.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한 그 기대 때문에 형은 고등학교 3년 내내 거짓말을 했고, 시시각각 자신을 짓눌러오는 거짓말에 괴로워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내가 딸기 쇼트케이크를 좋아할 거라고 기대하는 형에게 거짓말을 했다.  달리 말하면, 나는 형처럼 거짓말을 했다.’는 부담을 짊어지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벌을 주려고 했던 거다.

 

  그런 행동을 자기처벌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안 것은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영어 공부에 박차를 가하던 때였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어 독해 지문 속 자기처벌의 예시는 내가 했던 행동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것들뿐이었지만, 난데없이 시궁창 속으로 던져진 초등학생이 생각해낼 수 있는 자기처벌의 방식은 고작해야 그런 것뿐이었다.  거울 속의 자신에게 형이 겪었을 괴로움을 그대로 전가하는 것.

 

  그날 이후로 형은 집에 돌아올 때면 이따금씩 딸기 쇼트케이크를 사오곤 했다.  별다른 말없이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딸기 쇼트케이크는 자연스럽게 내가 가져가야 할 물건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먹고 빈 그릇을 다시 내어놓는 자기처벌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것이 내가 형에게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하지만 지금도 납득할 수 없는 건 형이 없는 순간에도 딸기 쇼트케이크를 찾는 내 모습이었다.  형이 일 때문에 집에 돌아오지 않는 때에도 나는 가끔씩 집에 가는 길에 딸기 쇼트케이크를 사가곤 했다.  금전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대체재랍시고 로손의 딸기 롤 케이크를 사기도 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몇 번이고 말할 수 있지만 나는 쓸데없이 불타올라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아니다.  의무도 아닌 일에 장기간 매달리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굳이 내 손으로 사먹을 필요도 없는 딸기 쇼트케이크를 계속 찾고 있었다.  이걸 백 개쯤 먹으면 형에게 사과를 할 자격이 생기는 것도, 형의 마음을 한 자락쯤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닌ㄷ…….

 

  아니, 어쩌면 그게 맞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좋아하지도 않는 딸기 쇼트케이크를 묵묵히 삼키는 것은 그저 자기처벌의 일종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진심으로 딸기 쇼트케이크를 좋아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형에게 모든 것을 사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물론 형을 멋대로 환상 속 히어로로 만들어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괴로운 일을 겪고도 나를 이해하려는 형의 마음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나는, 형에게 사과하고 거울 속의 나를 향해 화해를 청하고 싶었던 거다.

 

  그런 거였나, 하지만 나는…….

 

-

 

  “뭐가 그런데?”

 

  난데없이 끼어든 하나마키의 목소리가 츠키시마를 현실로 되돌려놓았다.  쟁반 위에 놓여있던 대여섯 개의 슈크림은 한 개를 제외하고는 사라진 지가 오래였다.  슈크림의 대부분이 사라질 만큼 시간이 많이 지난 모양이었다.  그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455.  애초에 학교까지 뛰어갈 생각도 없었지만 뛰어가든 걸어가든 확실히 늦을 시간이었다.

 

  “그쪽이 알 바 아닙니다.”

  “우와, 매정하네.  그래도 그런 것의 이유가 된 당사자에게는 얼굴 보고 확실히 말해줘, 분명 좋아할걸?”

  “뭘 좋아할 거라는 소리인지 모르겠는데요.”

  “딸기소년이 말한 그런 거’, 네가 딸기 쇼트케이크를 좋아하게 된 이유지?  그런 이유를 만들어준 당사자한테 들려주면 분명 좋아할 거라고.”

 

  그렇게 말한 뒤 하나마키는 씩 웃었다.  과연 자기 입으로 잘생겼다고 자부할 만큼 산뜻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츠키시마는 근거도 없는 말을 믿을 정도로 비논리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근거 없는 소리.”

  “아니거든요.  아까 말했지?  너만큼 사람 신경 잘 긁는 녀석이 있다고.  그 녀석은 말이야, 자기가 믿는 사람에게는 좀 성가실 정도로 솔직하거든.  우유빵 말고 다른 건 쳐다보지도 않던 녀석이 내가 한 번 먹어보라고 던져준 슈크림 덕분에 슈크림도 좋아졌다고 대놓고 말하니까 기분은 좋더라.  그러니 네게 계기를 준 사람도 분명 좋아할 거야.”

  “…….”

 

  자신은 형에게 손을 내밀어 사과를 하는 방법을 모른다.  거울 속의 자신에게 화해를 청하는 방법은 더더욱 모른다.  하지만 그런 자신에게도, 누군가와 마주보고 사과의 말이나 화해의 말을 꺼낼 수 있는 차례가 돌아올까?

 

  츠키시마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질문에 지금 당장 답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전전긍긍하고 있을 주장을 안심시키는 일과…….

 

  “먼저 갑니다.  그리고 아까 절 민망하게 만든 것에 대한 복수는 이걸로 갈음하죠.  다시는 만날 일 없으면 좋겠네요, 딸기머리 씨.”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수치스러운 기억을 선물한 이에게 아주 작은 복수를 하는 일이었다.  그는 딸기크림이 든 토토로 슈크림을 반으로 갈랐다.  부지불식간에 상체와 하체를 분리당한 토토로의 표정이 퍽 슬퍼 보이는 것은 분명 기분 탓일 것이다.  그리고 입안에 들어온 딸기크림 속에,

 

  그가 기억하던 딸기의 신맛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러는 게 어디 있냐고 소리치려던 하나마키는 애늙은이의 얼굴에서 소년의 미소를 보았다.

 

Chapter 4 : 딸기 쇼트케이크의 세 번째 의미

 

  “늦어서 죄송합ㄴ…….”

  “츠키시마 군, 괜찮아요?  열이 많이 심한 건 아니죠?”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타케다는 부리나케 츠키시마에게 다가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그런 고문 선생을 본 츠키시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열이라니, 감기 걸렸다는 말은 한 적도 없었는데.

 

  해답을 준 것은 멀찍이 서있던 다이치였다.  그는 츠키시마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입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목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보니 입모양으로만 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감기.  짧은 두 음절만으로 전후사정을 대강 짐작한 그는 타케다에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냥 미열이었어요.”

  “괜찮다니 다행이에요.  다음 주에는 세이죠와의 첫 연습시합도 있는데다 츠키시마 군은 장신 선수가 별로 없는 카라스노의 귀중한 장신 선수기도 하니까…….”

 

  나츠메 소세키의 작품을 읽기에 적절한 미성이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연습할 수 있겠어요?’라고 물었다.  츠키시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한 시간 전의 일이 마치 꿈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사립 아오바죠사이 고등학교 체육관.

 

  츠키시마 케이는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그가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표정을 지은 것은 카라스노 고등학교의 체육관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체육관 크기 때문은 아니었다.

 

  “, 딸기소년.  너 배구부였냐!?  그때 교복 보고 카라스노 학생인 줄은 알았지만 배구부 1학년일 줄은 몰랐는데.  하긴, 키가 유난히 커서 부 활동으로 배구나 농구 같은 걸 하지 않을까 했는데 진짜 배구부였을 줄이야.”

  “…….”

  “그런데 너 그새 더 큰 것 같다?  올려다볼 때 느껴지는 목의 뻐근함이 저번하고 미묘하게 다른 게……!”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는 이 학교의 체육관에 익숙한 얼굴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익숙한 얼굴의 주인은 쓸데없이 자신을 반가워하고 있었다.

 

  “어이, 츠키시마.  너 지난번에 어디 나갔다 왔다더니 그때 저 자식 만나서 스파이 활동이라도 한 거냐?”

  “아니거든요, 타나카 씨.”

  “, 츳키이진짜 타나카 씨 말대로 스파이였어……?”

  “아니라고, 야마구치. 조용히 좀 해.”

 

  그것도 자신이 같은 팀에게 스파이로 의심받을 만큼 심하게.

 

  “어이, 딸기소년.  다음 달 22일에도 시간 나면 거기로 와.  다음번에는 이 형이 딸기 쇼트케이크 사줄 테니까.”

  “거절하겠습니다.”

  “그렇게 단칼에 거절하기 있어!?”

 

  당연히 있지, 왜 없겠어.  그렇게 중얼거린 츠키시마는 정렬하라는 소리를 뒤로 한 채 코트에 들어섰다.  이 연습시합에서 이기고 나면 딸기 쇼트케이크에 세 번째 의미를 추가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Fin.


1. 카페 카우벨은 센다이에 있었던 카페인데, 22일을 쇼트케이크의 날로 정하고 처음 퍼트린 베이커리라고 해요.  지금은 없어졌는지 타베로그에 찾아봐도 나오질 않지만......


2. 토토로 슈크림을 파는 곳은 도쿄 세타가야 구 세타가야다이타 역 근처에 위치한 시로히게의 슈크림 공방.  맛있었어요...


3. 타케다 선생님과 나츠메 소세키를 연결지은 건 성우분이 맡은 역할 중에 나츠메가 있어서... 그리고 묘하게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물론 그 분은 문호 스트레이독스에서 에도가와 란포로 나오셨지만 (웃음)

Posted by _Flaneur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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