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그 책방에는 백일홍이 없다 下
w. Flaneur
Chapter 3 : 교쿠로노사토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계산대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종이무덤 안에서 ‘핑’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아카아시는 졸업논문에 도움이 될까 싶어 가져왔던 참고문헌 더미 속에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핑’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자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하루 이틀 친절한 게 아닌 나도 이 자식이 이러니까 도저히 같이 다닐 수가 없다.」
「(사진)」
쿠로오가 보낸 라인 한 통과 보쿠토를 찍은 사진 한 장. 사진 속 보쿠토는 제법 큰 백일홍 나무줄기에 매달려있는 채였다. 의도를 알 수 없는 그 행동에 아카아시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쯤, 휴대전화가 요란한 소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전화였다. 통화 버튼을 누른 뒤 휴대전화를 귀에 갖다 대자 듣기 좋은 중저음이 흘러나왔다.
「사진 봤어?」
“네, 봤습니다. 보쿠토 씨는 왜 그러고 있는 겁니까.”
「거기 매달려있으면 그럴듯한 생각이 날 것 같다더라.」
“여전하네요, 보쿠토 씨도.”
안 그래도 이 꼴을 2년이나 본 네가 존경스러워지려는 참이야. 쿠로오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손윗사람에게 존경의 눈길을 받는 것을 굳이 사양할 생각은 없었지만, 존경의 눈길을 받는 것보다 급한 건 무시무시한 하중을 견뎌내고 있을 백일홍 나무를 구하는 일이었다.
“계속 매달려 있다가 학사경고 받아도 책임 못 진다고 하시면 내려올 겁니다. 보쿠토 씨, 낙제라면 질색을 하는 사람이니까.”
「안타깝게도 낙제 플래그는 오래 전에 꽂혔어. 저 녀석, 며칠 전에 졸업시험 재시험 통보받았다고.」
“……올해‘도’ 졸업은 요원한 겁니까.”
손가락 마디 하나만큼의 경악과 한 주먹의 걱정이 섞인 한마디가 아카아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한마디에 드리운 걱정의 그늘이 상대에서도 느껴졌는지, 휴대전화 건너편에서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그 책방은 이름을 ‘바람 잘 날 없는 부엉이 둥지’라고 짓는 게 나았겠어―.」
그것은 분명 자신을 반쯤 놀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쿠로오의 농담 섞인 도발에 꽤 익숙했던 아카아시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지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채.
“그건 너무 직설적이잖습니까.”
「……오야? 지금 그 말, 사루스베리 서사라는 이름이 우회적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느물느물한 목소리에 가려지긴 했어도 그 질문에는 뼈가 있었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위기를 타파할 계기’ 정도는 스스로 만들어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계기가 외부에서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오래 전 네코마의 부주장 카이 노부유키가 떡하니 튀어나온 자신의 조커를 뽑아주었던 그때처럼 손님 한 명만 찾아온다ㅁ…….
딸랑―.
“손님이 왔으니 이만 끊겠습니다.”
아카아시는 상대의 말을 듣지도 않고 화면 속 붉은 버튼을 줄기차게 눌렀다. 금세 화면이 어두워지며 한 세계와 또 다른 세계가 단절되었다. 고양이처럼 교묘하기 짝이 없는 유도심문에 걸려들 뻔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카아시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사루스베리 서사입니다.”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 인사는 여전히 칼 같네―.”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손님은 손님이니까요. 하시는 행동을 보니……밖에 비가 오는 모양이네요, 스가와라 씨.”
“응, 여우비인 모양이야. 일단 창문부터 닫는 게 좋지 않을까?”
한 손에 죽세공 바구니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부산스럽게 젖은 머리를 터는 스가와라 코우시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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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닫힌 폴딩도어 바깥쪽에서는 여우비가 후드득거리며 떨어지고, 안쪽에서는 녹차를 우리기 위한 물이 살살 끓고 있었다. 작은 원목 테이블 두 개를 이어붙인 자리에서는 물을 끓이기 위한 티워머와 유리 티포트, 도자기 찻종 두 개, 차호(주: 잎차를 넣어두는 통), 아카아시가 읽다가 엎어놓은 한국어 책 「그림자 여행」이 제자리를 찾느라 분주했다. 만든 이의 개성이 느껴지는 다구들은 스가와라 본인이 세토모노마츠리(주: 아이치 현 세토 시에서 열리는 도자기 축제)까지 찾아가서 사온 것이라고 했다. 그새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 것을 확인한 그는 티워머 속 티라이트를 끈 뒤 티포트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어느 쪽으로 할래?”
차호를 열어 내용물을 보여준 스가와라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검붉은 빛의 잎차가 들어있는 통과 짙은 녹색의 잎차가 들어있는 통. 아카아시는 짙은 녹색의 잎차에서 자신의 눈동자 색과 같은 색을 보았다.
“녹색으로 하겠습니다.”
“우리 괴짜 콤비가 타점에서 멈추는 토스를 올린다는 걸 알아봤을 때부터 배구를 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차를 보는 눈도 있구나, 아카아시는.”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 차, 시즈오카 현의 교쿠로노사토(玉露の里)(주: 시즈오카 현 후지에다 시 오카베쵸에 위치한 최고급 녹차 생산지)에서 가져온 옥로(玉露)(주: 찻잎이 나올 무렵 그늘을 만들어 햇빛을 덜 받게 만든 최고급 녹차)인데 엄청 비싸거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얼마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스가와라는 놀랄 텐데, 라고 말하며 해사하게 웃었다. 초여름이라는 계절이 사람으로 태어나 근심걱정 없이 웃었다면 틀림없이 저런 표정이었을 것이다.
“5천 엔.”
“……비싸네요.”
5천 엔. 사쿠라신마치에서 비싸다고 소문난 프렌치 비스트로의 저녁식사 가격이 2천 엔이다. 이 문제의 옥로차는 그 저녁식사보다 두 배는 비쌌다.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단정하게 내려놓은 아카아시는 그런 차를 같이 마시자고 가져온 이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제게 차를 보는 눈이 있다고 해도, 그런 차를 취급하는 사쿠라비요리(桜日和)의 주인만 할까요.”
“역시 한 마디도 안 져주네—.”
찻집 사쿠라비요리의 젊은 주인, 스가와라 코우시가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아카아시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추억에 잠긴 것을 보니 그들이 처음 만났던 후쿠로다니 그룹의 여름방학 합숙을 떠올리고 있는 듯싶었다.
폭풍처럼 지나갔던 여름방학 합숙이 먼 옛이야기가 되었을 때, 그들은 사쿠라신마치의 어느 골목길에서 다시 한 번 조우했다. 그날 아카아시는 진보초에 몰려있는 몇몇 출판사에서 받은 책 꾸러미를 들고 있었고, 스가와라는 오카야마 현이 자랑하는 특산품인 죽세공 바구니를 품에 안고 있었다. 서로의 생업이 달린 물건을 든 채 어색한 인사를 나눴던 두 사람은 이내 너나들이하는 사이가 되었다. 세터였다는 공통점과 서로의 생업에 대한 작은 호기심의 그들의 발걸음을 서로의 가게로 이끌었던 덕분이었다.
스가와라는 본인 입으로 ‘영국 교환학생 시절 위타드(Whittard)에서 마신 홍차를 잊을 수 없어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찻집을 시작했다고 했다. 다들 하나같이 장난기가 넘치던 카라스노 배구부 출신답게 재치 넘치는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매운 마파두부를 먹고 입가심으로 차를 한 잔 마시면 입안이 개운해져서 마파두부를 한 그릇 더 먹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잖아. 그러나 아카아시는 그 이야기에 중요한 진실이 빠져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스가와라가 사루스베리 서사에 놓고 간 차칙(주: 대나무로 만든 찻숟가락)을 가져다주기 위해 사쿠라비요리에 갔을 때, 새 주인을 대신해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의 외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 애는 줄곧 내 인생이나 다름없는 찻집을 이어갈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을 쓰고 있었어. 그래서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면서까지 여기로 온 거겠지…….’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는 그날 들은 이야기를 조용히 비밀에 부쳤다. 세상 무신경해 보이는 그도 당사자가 하지 않은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떠벌릴 만큼 무신경한 편은 아니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 다 됐네. 찻집 주인의 짧은 감탄사와 함께 찻잎이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가와라가 차칙으로 잎차를 휘젓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그 정도로 좋은 차를 매번 맨입으로만 받아먹고 있으니 죄송해서 어떡하죠.”
“그럼 찻값 대신 왜 사루스베리 서사인지 말해줄래?”
“아, 그건……예?”
아카아시는 순간 서서히 끓는 물에서 정체모를 위험을 느끼고 탈출한 개구리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몇 년 전 2학년이 된 히나타가 후쿠로다니 그룹 합숙에서 했던 말이 새삼스럽게 다시 떠올랐다. 스가와라 선배는 타고난 목소리가 상냥해서 그런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하지 말아야 될 말까지 줄줄 하게 되더라고요―. 히나타의 말이 맞았다. 이 사람은 한가로운 동네의 찻집 주인이 아니라 도쿄 경시청 수사1과의 수사관이 되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쯤 생글생글 웃는 얼굴과 상냥한 목소리를 앞세워 순도 백 퍼센트의 자백을 이끌어내는 ‘경시청의 다크호스’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깝다―, 거의 다 된 거나 다름없었는데.”
“보쿠토 씨가 부탁했습니까?”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 가운데 티 스트레이너(주: 차 거름망) 속의 옥로 잎이 작은 세계를 진한 연둣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은회색 머리 청년은 능숙한 손길로 티 스트레이너를 빼낸 뒤 두 개의 찻종에 차를 번갈아 따르기 시작했다. 찻종을 향해 흘러내리는 찻물과 함께 어른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그렇긴 하지만 솔직히 나도 궁금했거든. 이름부터 대놓고 벚꽃 마을인 곳에서 꿋꿋하게 ‘백일홍 서사’를 고집하는 이유.”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10억 엔을 준다고 해도 사루스베리 서사인 이유를 말하지 않겠다.’고 못박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보쿠토나 쿠로오가 아니라 스가와라 코우시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5천 엔의 찻값이 빚 아닌 빚으로 남아있었다. 결정적으로 10억 엔은 5천 엔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다.
그러니 5천 엔어치의 힌트 정도는, 줘도 괜찮은 게 아닐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책방의 이름을 사루스베리 서사라고 지은 건…….”
잘린 말 뒤에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찻종 둘레를 맴돌며 어디까지 말해야 좋을지를 가늠하던 손가락이 엎어놓았던 책을 다시 뒤집었다. 지근거리에 있던 미도리 사(社)의 스티키 메모와 만년필을 끌어온 그는 책 속의 한 문장을 필사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꽃말 때문이었습니다.”
만년필이 부지런히 움직인 끝에 한 문장이 나타났다.
「만날 수 없는 벗에게 내 마음을 전해주고 싶다.」
꽃말은 잘 모르는데, 검색 좀 해봐도 될까? 이윽고 스마트폰의 자판을 칠 때마다 나는 타다닥거리는 소리가 만년필이 사각거리는 소리와 뒤섞였다. 그러는 새에 또 한 문장이 새 생명을 얻었다.
「잘 있어줘,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게. 그저 같은 하늘 아래에만 머물러 있어줘.」
“아…….”
아카아시는 그 짧은 감탄사에서 5천 엔어치의 힌트가 그에게 유용했음을 깨달았다. 그 짧은 감탄사와 함께 그가 필사하던 문장도 끝을 맺었다.
「그렇게 기도하고 싶은 순간이다.」
“그래서 사쿠라신마치의 사루스베리 서사여야만 했던 거구나.”
“……네.”
세상에는 5천 엔어치의 무언가에서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과 10억 엔어치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5천 엔어치의 미약한 힌트에서 미처 알려주지 않은 것까지 찾아낸 이 사람은 후자라고 봐야 옳을 터였다. 과연 스가와라 코우시는 ‘어디 사는 부엉이 씨’와 달리 상상 이상으로 영리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보쿠토 씨나 쿠로오 씨한테 말씀하실 건가요?”
“글쎄, 나한테도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청량한 목소리로 보류의 뜻을 전한 스가와라가 미도리 사의 스티키 메모를 넘겨다보고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들으면 혼잣말 같기도 하고, 어떻게 들으면 혼잣말이 아닌 것 같기도 한 중얼거림이 찻종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한 덩어리가 되었다.
“역시 차를 보는 눈이 좋은 것 같아, 아카아시.”
“비싼 차를 알아보는 눈이 있다는 말은 아까도 하셨잖습니까.”
아니, 그래서 좋다는 게 아니야. 테이블 위에 찻종 두 개만 남겨두고 나머지 다구를 정리하던 은회색 머리의 청년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좀처럼 그치지 않는 여우비 소리와 다구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때문에 잘 들릴 것 같지 않던 말은 의외로 귓가에 선명하게 내려앉았다.
“본인에게 어울리는 차를 고르는 눈이 있다는 뜻이었어. 잎차 수급 문제로 시즈오카에 내려갔을 때, 교쿠로노사토 사람들이 그랬거든.”
“…….”
“옥로차는 마음의 갈증을 달래기 위해 마시는 차라고.”
Chapter 4 : 그 책방의 백일홍
금방 그칠 것 같던 여우비는 제법 거센 빗줄기가 되어있었다. 그 빗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카아시는 시선을 거두고 노트북 화면을 향해 눈을 내리깔았다. 화면 속에서는 구글 재팬의 검색 결과 페이지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백일홍의 꽃말 : 떠나간 벗을 그리워하다」
화려한 미사어구도, 쓸데없는 군더더기도 없는 한 줄에 손가락으로 밑줄을 그으며 아카아시는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인자한 노신사에게 사루스베리 서사의 진짜 의미를 간파 당했던 그 날을.
아카아시가 사쿠라신마치 골목길에 있는 1인 출판사의 대표와 안면을 틀 수 있었던 것은 약간의 무지가 부른 오해 때문이었다. 1인 출판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건물 앞에 쌓인 책더미를 본 그는 그 건물을 헌책방 건물이라고 보기 좋게 착각하고 말았다. 그대로 지나쳤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책 한 권을 집어 들어 읽기 시작한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그가 정신없이 일본 민속학의 바다를 부유하고 있을 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카아시를 민속학의 바다에서 건져 올렸다.
“우리 출판사 책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만.”
“죄송합니다, 헌책방이라고 착각해서 그만…….”
“책을 소독하겠다고 햇볕에 널어놓았으니 그렇게 착각할 법도 하지. 잠깐 들어오겠나? 1인 출판사를 운영하다 보면 가끔 사람이 그리워지는 법이거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주저하며 들어선 곳은 가히 책의 미로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곳이었다. 빼곡하게 들어찬 책과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교료 원고(주: 교정을 완전히 끝낸 원고). 책상 위의 교료 원고 뭉치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까치발로 종종걸음을 치던 아카아시는 이내 제법 깨끗한 책상 앞에 안착할 수 있었다.
“소개가 늦었군. 이와타 쇼인의 이와타 요시히로일세.”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아카아시(赤葦)라면 혹시…나나츠모리 쇼텐의?”
“아버지를 알고 계십니까?”
아카이시는 진심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나나츠모리 쇼텐은 그간 꽤 많은 책을 내왔지만, 카도카와 쇼텐이나 이와나미 문고 같은 거대한 출판사들에 비해 그 존재감이 희미한 곳이었다. 그러니 출판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세타가야 구의 작은 동네에서 그 이름을 듣는 것이 그에게는 적잖이 놀라운 일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잘 알지. 내가 메이쵸 출판사에서 일하던 시절에 만난 자네 아버지는 남들이 안 될 거라고 한 원고만 골라서 보란 듯이 성공시키는 나나츠모리의 편집자였으니까.”
“그랬습니까.”
“그러더니 나중에는 누구도 시도해본 일이 없는 크라우드 펀딩 출판을 시도하더군. 자네 아버지한테 많이 배웠다네. 몇 년 전에 그 친구에게 쓸데없이 일찍 철이 든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긴 했지만 이런 데서 만날 줄은…….”
그렇게 말하는 잿빛 머리 노신사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그는 이런 곳에서 지인의 아들을 만난 것이 내심 기뻤는지 아카아시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자네도 나나츠모리 쇼텐에서 일하고 있나?
“아니요, 이 동네에 책방을 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못 보던 입간판이 보이던데, 새로 생겼다는 사루스베리 서사의 주인이 자네였던 모양이군 그래.”
“네, 그렇습니다.”
물 흐르듯 이어진 대답에 노인이 몸을 반쯤 돌려 창문 너머에 시선을 주었다. 그 행동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이 공간에 있는 그 누구도 짐작을 할 수 없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신사는 이내 흥미로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얼굴로 천천히 운을 뗐다.
“자네가 책방을 연 건 떠나간 벗들을 그리워하기 때문인 게지?”
“그걸 어떻게…….”
“그게 백일홍의 꽃말이지 않은가.”
초승달처럼 휘어진 노인의 눈 주위로 가늘게 주름이 잡혔다. 가느다란 주름은 노인이 가진 지혜의 원천이라도 되는 듯, 그의 말이 점점 진실에 가까워질 때마다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일찍 철이 들어버린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 상대에게 진심을 털어놓는 것을 주저하곤 한다네. 그런 사람이 진심을 완전히 숨길 수도 내비칠 수도 없을 때, 그만큼 좋은 도구가 또 어디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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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예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 되기로 결심한 빗소리가 그를 다시 현실로 데려다놓았다. 아카아시는 마지막으로 떠올렸던 그 말을 조용히 뇌까렸다. 그런 사람이 진심을 완전히 숨길 수도 내비칠 수도 없을 때, 그만큼 좋은 도구는 없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날 1인 출판사의 노신사가 했던 말 중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배구부 3학년들이 후쿠로다니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가장 요란하게 응석을 부린 사람은 두말할 것도 없이 보쿠토였다. 그리고 아카아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런 보쿠토를 능숙하게 진정시켰다.
선배들을 일곱 명이나 떠나보내는 졸업식이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눈시울을 붉혀야 마땅했지만 그날도 아카아시는 끝까지 눈시울을 붉히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본 후쿠로다니의 3학년들이 이런 날까지 침착할 수 있는 게 놀랍다며 혀를 내둘렀었다.
그가 주장이 된 이후의 나날들은 화살보다도 빠르게 지나갔다. 당장 요나카 감독과 타키자와 코치가 뽑은 1, 2학년 레귤러들을 모아 새로운 팀을 구성하는 일이 그의 앞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배구부 주장으로서 인터하이와 봄철 배구 고교 대회라는 길을 정신없이 달리다 멈춰선 어느 날, 아카아시는 아무도 없는 부실 벽에 기대 모래성이 허물어지는 것 마냥 스르륵 주저앉았다. 적막에 휩싸인 그곳에서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감싼 아카아시 케이지는 몇 가지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이 의외로 막내 같았던 주장과 그의 친구에게 많이 의지했다는 것과 줄곧 그들을 추억했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자신도 모르게 억누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런 생각이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한 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무의식이 그 생각을 다그쳤다. 그런 생각은 치기에 불과하다고, 그러니 꿈에서라도 수면 위로 올라올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그 ‘치기’는 아카아시의 가장 깊은 그림자가 되었다. 고등학생 때의 치기어린 생각으로서는 누군가에게 전해질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카아시가 책방 창업을 이유로 가업 승계를 유예한 건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자신에게, 그리고 내내 억눌려있던 ‘치기’라는 이름의 그림자에게 진심을 털어놓을 기회를 주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책방의 위치는 필연적으로 세타가야 구의 사쿠라신마치가 되어야만 했다. 그가 진심을 전해야 할 상대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찍 철이 들어버린 누군가는 쉽사리 상대에게 진심을 털어놓지 않았다. 아니, 털어놓지 않았다기보다 털어놓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터였다. 결국 이와타 요시히로의 말처럼 아카아시도 결정적인 순간 ‘주저하고 마는’ 사람이던 셈이었다. 그래서 그는 숨길 수도 내비칠 수도 없는 진심을 위해…….
「이 책방, 주변에 백일홍 나무는 한 그루도 없는데 왜 사루스베리(百日紅) 서사야?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어!」
한 그루의 꽃나무를 방해로 내세우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름 내내 떠나간 벗을 그리워하는 ‘사루스베리‘가 책방의 이름에 스며들었다.
보쿠토는 사루스베리 서사 주변에 백일홍 나무가 한 그루가 없다고 말했지만, 사루스베리 서사 주변―아니, 사루스베리 서사 안―에는 분명 백일홍 나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쿠토는 영원히 그 백일홍 나무를 찾아내지 못할 운명이었다.
왜냐하면 사루스베리 서사의 백일홍은, 형체를 잃지 않기 위해 꽃이 된 아카아시의 그림자이자 치기어린 진심 그 자체였으니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그는 문 닫을 시간이 한참 지났음을 깨닫고 가게 문을 닫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마지막 남은 불 하나를 끄기 전, 벽에 세워두었던 우산을 집어든 아카아시가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비가 내리는 유후인에 갔을 때 우산이 없어 앞뒤 가리지 않고 집어 들었던 우산이었다. 별 생각 없이 우산을 집어든 그에게 기념품 가게 주인이 ‘비를 맞으면 꽃잎이 나타나는 벚꽃 우산’이라고 힘주어 말하던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벚꽃이라고 했었는데, 오늘은 꼭 백일홍처럼 보이네.”
혼잣말을 마친 그는 마지막 남은 불 하나를 끈 뒤 지친 손길로 여닫이문을 밀었다. 빗방울이 줄기차게 쏟아지던 그날 밤, 아카아시는 ‘진심’이라는 이름의 백일홍을 어깨에 진 채 사쿠라신마치의 길거리를 걸어갔다.
Chapter 5 : 이제 길을 만들 수는 없다고 해도
호기롭게 시작되었던 대장부엉이와 붉은발 올빼미의 내기는 의외로 허무하게 끝이 났다.
“내가 졌어! 항복이야!!”
자신만만하게 본인이 이길 것이라 외쳤던 자의 항복 선언과 함께.
“뭐가 말입니까?”
3월 24일을 맞아 서가에 있던 책을 무지개 색 순서대로 정리하고 있던 아카아시가 뒤를 돌아보았다. 보쿠토는 세상 분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쿠로오가 아카아시의 시선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마는 것을 보니 그 역시 아무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스가와라가 차를 마시러 온 날 알게 되었던 진실을 입 밖에 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왜 사루스베리 서사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그냥 내가 진 걸로 할게, 아카아시!”
헤이헤이헤―이, 아카아시! 소원은!? 금색 눈이 호기심을 가득 담은 채 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소원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던 아카아시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영원 같던 찰나가 지나간 뒤, 그의 손목 근처에서 나풀거리던 니트 소매가 다시 서가를 향해 움직였다.
“책, 사주세요.”
“그게 다야!? 그 정도는 당연히 해줄 수 있다고.”
“한 달에 한 권씩.”
“응!? 한 달에 한 권씩 사라고?”
“일단 이번 달은……이 책이 좋겠네요.”
책방 주인이 내민 것은 문제의 「인사이드 헤드(インサイドヘッド)」였다. 보쿠토는 순순히 아카아시의 손에 들려있던 책을 받아들었다. 아직도 놀리는 거냐며 화를 낼 줄 알았던 보쿠토가 고분고분하게 굴자 놀란 쪽은 오히려 아카아시였다. 그러나 놀라움이 떠오른 얼굴은 보쿠토의 한 마디에 곧 평정을 되찾았다.
“좋아! 그런데 아카아시…….”
“왜 그러십니까, 보쿠토 씨.”
“그게…….”
쿠로오 말로는 오늘 보쿠토가 풀이 죽을 만한 일은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하고 싶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퍽 수상했다. 그러던 보쿠토가 갑자기 ‘짝’ 소리와 함께 합장을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부탁의 전조였다.
“오늘 네코마 OB 애들 몇 명이 놀러 와서 불고기 걸고 시합 하자고 했거든.”
“……?”
“그래서 나도 후쿠로다니 OB들을 다 불렀어. 그러니까!”
아아, 그래. 대충 알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아카아시가 짐짓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인간 부엉이 씨는 자신에게 길을 만들어달라고 할 작정인 것이다.
“토스 올려줘, 아카아시!!”
“오야, 보쿠토 자식.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리에프 녀석 부를 생각 없었는데 불러야겠구만?”
솔직히 말하면, 자신은 이제 더 이상 보쿠토에게 길을 만들어줄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네, 알겠습니다. 불고기가 드시고 싶다, 그 말씀이시죠?”
“아니, 후쿠로다니의 세터로서 좋은 토스를 올려달라는 거지! 이따가 내가 스트레이트로 쿠로오 녀석의 블록을 뚫어줄 테니까 예전처럼 기뻐해달라고, 아카아시!”
할 수 있는 일은 당신들에게 의지했고, 당신들을 존경했고, 때로는 추억했다는 사실을 억누르고 사는 것뿐이라고 믿었다.
“네, 네. 그렇게 할게요.”
“아카아시, 귀찮아서 대충 대답하는 거지?”
“……의외로 잘 알고 계시네요, 보쿠토 씨.”
“어이, 아카아시. 너 오늘따라 츳코미가 유난히 거침없다? 저 녀석이 저번에 왔을 때 뭐 하나 부수기라도 했어?”
하지만 길을 만들어줄 수 없다는 사실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너무해, 아카아시!”
“농담이었습니다.”
“아―카―아―시―!!”
자신은 이미 세상 누구보다 단순한 부엉이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능글거리는 고양이도, 심지어 자기 자신의 치기마저도 포용할 수 있는 ‘백일홍 나무 위 부엉이 둥지’를 만들어가고 있었으므로.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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