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로다이라 쿄 x 미즈노 에이타 콤비의 만화인 <스파이럴>의 4권 - 5권에 걸친 에피소드('5시의 번개'부터 '단 하나의 스마트한 방식'까지)의 서사 일부를 차용한 글입니다. 원작을 따로 두고 그것의 서사를 차용하는 일은 창작력 없음의 방증이라고 하지만, 창작력은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에... 고전이 되어버린 만화의 한 에피소드를 차용했습니다. 도심 전체를 무대로 한 추격전 속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전쟁콤비가 보고 싶었습니다.
- 이 글은 연작 단편의 일부이니 이전 글을 읽지 않으셨다면 아래의 글을 읽고 봐주세요,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시즈이자] 가로등 불빛처럼 명멸하며 하나씩 사라져 가는 (13권 이후 시점, 컬러버스 AU 2부작 上)
[시즈이자] 빗방울처럼 쏟아져 내려 세상을 물들이는 (13권 이후 시점, 컬러버스 AU 2부작 下)
[시즈이자] 夕焼けだんだん (노을이 점점, 미정발 네타 有)
[시즈이자] 어느 사립탐정의 험난한 첫 사건 기록 (미정발 네타 有)
[시즈이자] 생일, 고양이, 그리고―. (미정발 네타 有)
[시즈이자] 이케부쿠로에서 뒤틀린 믿음이 가지는 유용성 上 (미정발 네타 有)
[시즈이자] 이케부쿠로에서 뒤틀린 믿음이 가지는 유용성 中上 (미정발 네타 有)
[시즈이자] 이케부쿠로에서 뒤틀린 믿음이 가지는 유용성 中下 (미정발 네타 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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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부 스카이트리 라인 신덴 역.
플랫폼에서 14시 12분에 출발하는 아사쿠사 행 급행열차를 기다리던 이자야는 근처에 앉아있던 역무원을 불러 세웠다. 부름에 반응한 이는 ‘이달의 친절 역무원 상’ 같은 것을 몇 번이고 받아봤을 것 같은 얼굴의 소유자였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옆을 돌아본 그는 휠체어를 보더니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12분에 출발하는 열차에 탑승하실 거죠? 매트는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친절한 목소리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그 역무원은 짚어도 한참 잘못된 지점을 짚고 있었다. 이자야도 선량한 시민다운 미소를 지으며 그게 아니라, 쾌속급행에 탄 기관사와 교대하게 될 기관사시죠? 하고 운을 뗐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가까이 가서 말씀을 드릴 수가 없으니 잠깐만 숙여주시면…….”
그 말에 역무원이 가까이 와 상체를 숙였고, 이자야는 여우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귓가에 악마의 속삭임을 불어넣었다.
“부탁할 게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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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타박타박 소리가 들렸다. 운동화와 흙바닥이 만나면서 내는 가벼운 소리였다. 상자에 걸터앉아서 그 가벼운 소리를 듣던 시즈오는 고개를 들었다. 트렌치코트와 토트백, 그리고 운동화. 눈앞에 나타난 이는 기다리던 사람이 맞았다.
“통화하다가 갑자기 끊는 건 도대체 어느 나라 예의냐?”
“미안, 하필 그때 배터리가 나가버렸지 뭐야. 테더링이 의외로 배터리 소모가 심하거든, 특히 도청을 할 때는 더 그렇고.”
“너…너…도청 안 한다더니……!”
시즈오는 분노를 감추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며 말했지만, 눈앞의 여자는 그게 뭐 별일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 말을 믿었어? 사람 사이의 믿음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도 뒤집기가 쉬운데.”
“그건 그렇다 치고, 5분 남겨두고 오는 건 또 뭐야! 이러다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
“저런, 5분밖에 안 남았어? 그나저나 이걸 그렇게 기다렸단 말이지?”
레이카는 가방에서 해제 스위치를 꺼내 손에 쥐었다. 손 안에 들린 물건을 본 시즈오의 얼굴에 그제야 안도감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가지고 있었냐?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겨우 살았군.”
“가지고 있기만 하면 뭘 해? 난 절대 안 누를 건데. 당신은 폭발 시간이 되면 그대로 죽는 거야.”
“미안하지만 난 안 죽어. 이거 보여? 이 안에 들어있는 건 대략 12리터의 시너라고. 내 목에 걸려있는 폭탄이 폭발하면 반경 3미터 정도는 금방 불바다가 되지. 해제 스위치를 누르지 않으면 너도 죽어.”
5분 뒤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은 상황에서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코웃음을 쳤다. 헤이와지마 시즈오는 아직까지도 플라스틱 통 속에 들어있던 시너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약간의 한심함을 담아 그에게 진실을 말해주었다.
“정말 그 안에 시너가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해?”
“…….”
“그거, 내가 아까 찾아내서 전부 물로 바꿔치기해 놓은 거야. 그러니 그런 협박은 의미가 없다고. 당신은 이제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야. 그리고 그거 알아? 중성자선에 가장 효과적인 차폐막은 물이라는 거. 당신의 목이 폭발하는 순간 난 옆에 있는 강으로 뛰어들면 그만이야. 물론 목이 폭발하고 나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USB 메모리도 먹통이 돼서 못 쓰게 되겠지. 중성자선은 반경 내에 있는 전자기기를 전부 손상시키거든. 그렇게 힘들게 찾았는데 아까워서 어쩌나―.”
일장연설을 잠자코 듣고 있던 시즈오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려 USB 메모리를 꺼냈다. 그것을 앞뒤로 살펴보던 그는 USB 메모리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서 상대에게 들어보였다.
“네가 말하는 USB 메모리가 이거냐? 손상되는 게 그렇게 아까우면 줄 테니까 가져가.”
손목의 반동으로 튕겨나간 물건이 여자의 발끝에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거 가짜야. 진짜는 여전히 이케부쿠로 역의 코인로커 속에 있어.”
“뭐……!?”
“그 많은 USB 더미 속에서 네 동업자의 눈을 피해가며 진짜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것도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난 미리 가지고 있던 가짜를 꼬맹이에게 보여주고 도망친 것뿐이야. 그걸 보고 너희는 내가 진짜를 가져갔다고 착각한 거지.”
“……쳇.”
“USB 무더기는 그 근처에 있던 내 친구가 다시 42번 코인로커에 넣어놨어. 친절하게 확인 메일까지 보내주더군. 이제 이자야 자식이 녹음 파일을 회수하면 끝이야.”
레이카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이 그대로 드러나는 목소리였다.
“오리하라 이자야가…이케부쿠로로 가고 있어?”
“그래, 그 자식한테는 택시를 타고 이케부쿠로로 가라고 해뒀어. 아무리 늦어도 45분까지는 도착할 거다. 넌 이자야가 아사쿠사 역에 일찍 도착할 걸 대비해서 네 동업자라던 그 하얀 녀석을 역으로 보냈지? 그 녀석이 지금 출발한대도 벼룩보다 빨리 이케부쿠로에 도착하지는 못해. 결국 너희가 진 거야.”
‘설마, 설마 내가…저 녀석들 생각대로 움직였다는 건가!?’
당황한 채 굳어있는 이 앞에서 시즈오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그 표정은 어떻게 보면 제법 의기양양한 표정 같기도 했다.
“예상 못한 표정이군. 당연히 그럴 거야. 오리하라 이자야는 내가 화를 내면서도 자기 뜻대로 움직일 거라고 믿었지만 너희는 도청한 통화 내용만 가지고 우리가 서로를 불신한다고 생각했겠지. 거기서부터 틀렸던 거야.”
“……그래. 녹음 파일의 회수에서 내가 졌다는 건 인정할게. 그게 경찰에 넘어가면 성가시겠지만 애초에 그 정도 위험부담도 없이 대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제법 차가운 강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며 지나갔다. 바람이 차서 눈을 내리깔 법한데도 그녀는 눈을 치뜨고 시즈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녹음 파일은 회수할 수 있을지 몰라도 당신이 죽는 건 피할 수 없어.”
돌이킬 수 없는 사형선고를 받은 시즈오의 표정은 의외로 평온했다. 그는 이름에 어울리는 태연자약한 얼굴로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 물음에는 좀처럼 근거를 알 수 없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하냐?”
“그걸 말이라고 해?”
“플라스틱 통에 든 시너를 이미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어. 그리고 너도 도청을 했다면 알고 있었을 거 아냐, 내가 이 방법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쯤은. 그리고 그런 얄팍한 기술이나 도구에 의지하느니 차라리 이자야 녀석의 근거 없는 믿음에 의지하는 게 백배는 나을 거다. 그 녀석은 내가 다른 사람 손에 죽는 걸 자기가 두고 볼 것 같냐고 그랬거든. 그건 동기가 좀 불순하긴 해도 어쨌든 살리긴 하겠다는 소리 아니냐?”
“그런…근거도 인과관계도 뭣도 없는 믿음 따위가…….”
“인과관계 같은 거 알 게 뭐야.”
상자 안에 시너가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잠시 일어났었던 그는 다시 나무 상자 위에 걸터앉았다. 상자에 앉아 바라본 시계는 어느새 14시 2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 벼룩 자식의 뒤틀린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결과를 가져올지 같이 확인이나 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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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탄노, 코스게, 키타센쥬, 우시다……. 이자야는 지겹다는 눈을 한 채 차창 너머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쾌속급행답게 대부분의 역을 지나치고 있었지만 아사쿠사까지는 아직도 멀었고, 결정적으로 자신이 기다리는 ‘무언가’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그가 다음은 호리키리 역인가, 라고 중얼거리는 순간 열차 안에 안내방송이 울려 퍼졌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관제센터에서 CCTV를 통해 본 열차의 첫 번째 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 숨겨진 것을 확인했다고 하니, 첫 번째 칸에 계신 승객 여러분께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첫 번째 칸과 멀리 떨어진 칸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안내 말씀 드립니다…….”
난데없는 안내방송에 승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두 번째 칸에 있던 역무원이 승객들을 인솔하기 위해 첫 번째 칸으로 들어왔다. 자신을 바라보는 역무원에게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다른 승객들을 먼저 대피시키라는 말을 한 이자야는 그들이 천천히 객차를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히키후네 역, 혹은 오시아게 역을 지나칠 때쯤이면 전부 빠져나갈 테니 그때 시작하는 게 좋겠지.’
예상대로 히키후네 역을 지나치자 모든 승객들이 멀리 떨어진 다른 칸으로 옮겨갔고, 역무원은 혼자 남은 이자야를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혼자 가도 괜찮습니다. 바쁘신 분께 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제가 보조 기관사긴 해도 운전 칸을 지켜야 해서…그럼 믿고 가보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역무원이 운전 칸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자 첫 번째 객실에는 이자야 한 명만 남았다. 눈앞에 오시아게 역이 보였다. 이제 계획했던 것을 실행에 옮길 시간이었다.
달칵―.
이자야가 손목에 힘을 주자 소매 안쪽에서 주머니에도 들어갈 만큼 작은 권총이 튀어나왔다. 손목에 적당히 힘을 주면 물건이 튀어나오는 장치와 포켓 피스톨. 그는 이것을 챙기면서도 정말 쓰게 될 순간이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털망토 차림의 남자는 총을 쥔 채 휠체어를 굴려 출입문 앞에 자리를 잡았고, 유리창을 향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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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벼룩 자식의 뒤틀린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결과를 가져올지 같이 확인이나 해보자고.”
레이카는 한낱 믿음 따위가 대단한 결과를 가져올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 헤이와지마 시즈오가 살아날 방법은 없었다. 오리하라 이자야는 이케부쿠로를 향해 달리고 있었고, 해제 스위치를 누르게 만들 시너는 물이 된 지가 오래였다. 결론적으로 기적을 바라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뒤틀린 믿음 따위가 기적을 부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휴대폰 배터리 다 됐다고 했지? 카운트다운은 내 시계로 해.”
건네받은 시계의 바늘이 가리키고 있는 시각은 14시 27분 22초였다. 그녀에게 시계를 건네준 시즈오는 고개를 돌려 스미다 강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물결은 놀라울 정도로 잔잔했다.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야. 첫 번째는 네가 해제 스위치를 누르는 것.”
“나를 무슨 자선사업가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절대 안 누를 거야.”
“그럼 스위치는 왜 들고 있냐? 시너를 물로 바꿔치기하러 왔을 때 진작 강에 던져버리거나 돌로 내리쳐서 부쉈어야지. 날 살릴 생각으로 지금까지 들고 있던 거 아니야?”
“…….”
“솔직히 망설이고 있지? 날 죽이는 거. 까놓고 말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컴퓨터 파일을 망치는 것처럼 기술만 있다고 가능한 게 아니거든.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 없으면 사람을 죽이려는 시도조차 불가능하다고.”
그는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르는지 자연스럽게 하늘을 쳐다보았다. 지독할 정도로 푸른 하늘을 보니 하늘을 닮은 목소리를 가진 녀석이 떠올랐다. 그 녀석과 죽기 직전까지 싸웠던 기억이 밀려오자 이유도 없이 눈가가 시렸다.
“넌 아까 믿음 따위가 대단한 결과를 수는 없다고 했지? 그래,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 어릴 때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주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 인간 같지도 않은 완력을 보고 나를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했거든. 이번에는 다르지 않을까 진심으로 믿어 봐도 썩 대단한 결과는 안 나오더라고.”
“이번에도 그럴 거야. 그러니까 탐정 나리는 여기에서 죽는 거지.”
“그래서 네가 틀렸다는 거야.”
담배 한 대 피워도 되냐? 라는 말을 덧붙인 시즈오는 상대의 동의가 떨어지기도 전에 멋대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물고 눈을 내리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오리하라 이자야는, 오래 전에 진심으로 나를 죽일 수 있다고 믿고 나와 싸웠던 적이 있어. 평소에는 배에 나이프를 5mm도 쑤셔 넣질 못하던 자식이었는데 그때는 정말 굉장하더군. 정말 죽기 직전까지 갔었다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뭐, 녀석이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나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일 수 있지 않았나 싶다는 얘기지. 그도 그럴 게 그 자식이 쓰던 기술은 평소랑 별반 다를 게 없었거든. 그럴듯한 근거도, 인과관계도 없이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믿음만으로 상대를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가는 녀석이라면.”
“…….”
“그 상대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죽을 리 없다는 허무맹랑한 믿음만으로도 대단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지 않겠냐?”
궤변이다. 레이카의 머리는 저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궤변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믿음에 뒤따르는 건 언제나 배신이다. 믿음은 결코 기적이나 그에 필적하는 강한 운을 불러들일 수 없다. 게다가 그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쪽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자신이 해제 스위치를 누르지 않으면 헤이와지마 시즈오는 죽는다. 그런데 왜 자신이 떨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저 얼토당토않은 믿음이 기적을 부를 것이 두려워서……?’
“그래도 해제 스위치는 안 눌러. 당신 말대로 당신을 확실히 죽일 수 있다는 믿음이 없어서 기폭 스위치를 누를 수 없을지는 몰라도 해제 스위치만큼은 안 누를 거라고!”
악에 받친 목소리가 끝을 모르고 커지기 시작했다. 믿음에 대한 궤변이 그녀가 애써 외면하던 무언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궤변이 선 발밑을 무너뜨리려고 애쓰고 있었다.
“믿음 끝에 찾아오는 건 배신뿐이야. 그 사실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몇 번이고 겪으면서 깨달았어. 그래서 그 배신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는데, 복수를 마무리하기 직전에 한 번 실수해서 일이 이 지경까지 왔다고 내가 그 생각을 꺾기라도 할 것 같아!? 해제 스위치를 안 누르는 걸로 뒤틀린 믿음은 아무 것도 불러올 수 없다는 걸 증명해주겠어.”
그 모습에 고집 하고는, 하고 중얼거린 시즈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는 해제 스위치를 눌러줄 생각이 추호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제 하나뿐이었다.
“그럼 이제 내가 살아날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셈이군.”
“그런 방법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 있어. 운 좋게 이 폭탄이 고장 나서 불발로 끝나는 거지.”
자신만만한 말투에 여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저 남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몰라서 저런 팔자 좋은 소리를 하는 게 분명했다. 자신의 직업과 전 직장을 알았다면 절대 그런 소리를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제정신이야? 당신 말처럼 세상일이 다 자기 좋을 대로 흘러간다면 나도 이 지경까지는 안 왔어.”
“이런 경우라면 충분히 자기 좋을 대로 흘러갈 수도 있지. 질 나쁜 해커가 인터넷을 대충 참고해서 만든 폭탄이라면 불량이어도 이상할 게 없잖아?”
“그걸 만든 건 나야. 만에 하나라도 불량은 있을 수 없어.”
“그거 자의식 과잉이라고 생각하지 않냐?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렇다면 1억 개중에 하나는 불량일 수도 있겠군. 하필이면 그 하나가 이 녀석일지도 모르지.”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녀가 그 폭탄의 핵심 기술을 찾아내기 위해 쏟아부은 시간을 다 합친다면 1만 시간 정도는 가볍게 넘길 수도 있었다. 그런 폭탄에 대고 불량품을 운운하는 것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헤이와지마 시즈오는 그 시간을, 그 시간이 쌓아온 기술을 믿음과 운 하나로 뒤집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폭발까지 1분 정도 남지 않았나? 카운트다운 안 할 거냐?”
14시 29분 40초. 폭발까지는 20초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벼룩 자식의 뒤틀린 믿음이 가져오는 결과가 어떤 걸지 한 번 지켜보자고.”
14시 29분 50초. 시즈오는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레이카는 발을 옮겨 시즈오의 앞이 아닌 강변 옆에 자리를 잡았다. 폭탄이 폭발할 조짐을 보이면 지체없이 강물로 뛰어들기 위한 사전조치였다.
“10, 9, 8, 7, 6, 5, 4, 3, 2, 1……0.”
14시 30분 00초. 폭발은 없었다.
“폭발은 물 건너갔군.”
“말도 안 돼, 이럴 수는…이럴 수는 없어…….”
여자의 손에서 해제 스위치가 먼저 떨어졌고, 뒤이어 여자가 잔디밭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녀는 말도 안 된다는 소리만 끝없이 주워섬기고 있었다.
“진짜 놀랍군 그래. 이자야 자식, 진심으로 날 죽이지 못할 게 싫었던 모양이야. 이런 운을 선물해주다니……. 내년 후쿠부쿠로에는 네놈의 운이라도 넣어서 달라고 멱살이라도 잡아볼까.”
레이카는 믿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쌓아온 시간이, 죽도록 해왔던 계산이, 끊임없이 수정을 거듭해온 기술이 우연이나 운 따위에 졌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사회는 인간의 믿음에 거짓말로 답할 수 있어도, 자연법칙은 인간에게 거짓말을 할 줄 모른ㄷ…….
‘잠깐, 시간…거짓말……?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도쿄 크루즈의 선착장을 바라보았다. 유람선은 출발하려는 기색이 없었다. 유람선을 타기 위해 늘어선 줄이 여전히 길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시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뜻대로 하게 놔둘 것 같아!?”
말보다도 발이 빨랐다. 그녀는 발로 바닥에 떨어진 해제 스위치를 차서 강으로 날려 보냈다. 해제 스위치는 풍덩 소리를 내며 옅은 파문을 그린 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쿄 크루즈의 선착장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속을 뻔했어. 저 유람선은 시간에 맞춰 칼같이 출발하기로 유명한데 정각에 출발하기 시작해서 30분 간격으로 다음 유람선이 출발하거든. 결국 배가 출발하지 않았다는 건 30분이 되지 않았다는 걸 뜻이야. 이 시계, 몇 분 빠르게 해놨는지는 모르겠지만 빠르게 돌려놓긴 했지?”
“……들켰나.”
“여유 넘치는 태도로 날 흔들어서 시간이 거짓말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그때 시계를 건네 카운트다운을 시켰겠지. 빠르게 돌린 시계니까 30분이 되어도 폭탄은 폭발하지 않아. 카운트다운 전에 불량품에 대한 말을 들은 내가 충격을 받아서 스위치를 떨어뜨리면 그걸 낚아채서 폭탄을 해제할 생각이었겠지.”
“맞아. 참고로 시계는 3분 빨리 가도록 돌려놨었어.”
시즈오는 자신과 이자야의 수가 다 읽혔다는 생각에 풀이 죽었다. 자신만만한 표정은 새 주인을 찾아갔는지 이제는 레이카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이겼어. 이제 당신의 죽음은 돌이킬 수 없어, 탐정 나리.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유언이라도 남기지 그래? 오리하라 이자야를 죽이기 전에 내가 친히 그에게 들려줄 테니까.”
“10초만 더 있었으면 성공했을지도 모르는데 네가 너무 빨리 알아채서 곤란했다고 전해.”
“그거 유감이네. 내가 머리만 좋은 게 아니라 운동신경까지 좋아서 말이야.”
시계를 들여다보던 레이카는 남은 시간을 확인한 뒤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 한 마디는 죽음을 앞둔 사람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생의 마지막 순간 올리는 기도는 죽음의 좋은 길동무가 될 터였다.
“시간이 남는데 기도라도 좀 하든가.”
“그럴까. 이럴 때는…‘주여, 어둠 속에서 당신을 향해 부르짖나이다.’라고 하면 되나?”
“당신에게 남은 신은 사신(死神)뿐이야.”
이 상황에서도 당신을 구해줄 신이 있다고 생각하다니 대단하네. 그렇게 입을 삐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신 얘기를 듣자 그는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사신 얘기를 하니까 생각난 건데, 이자야 녀석이 그러더군. 일본 옆에 있는 어떤 나라에서는 이 두 단어의 발음이 같다고.”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넌 내게 남은 신이 사신(死神)뿐이라고 했지만…….”
몇 번의 손놀림과 함께 바람이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앞머리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머리카락이 제법 가지런해진 것을 확인한 그는 몸을 반쯤 틀어 뒤에 있는 철교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턱짓으로 스카이트리를 가리키며 무심하게 말했다.
“잘 봐, 저기 오고 있는 건 사신(邪神)(주: 장난을 좋아하는 사악한 신)이라고.”
햇살에 눈을 찌푸린 레이카가 본 것은 멀리서 다가오는 지하철 한 대였다. 도부 스카이트리 라인의 급행열차. 그 급행열차의 첫 번째 칸 두 번째 출입문에서, 털망토 차림의 남자가 깨진 유리창 너머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지하철이 선로를 달리며 내는 덜컹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머릿속도 덜컹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무너지려는 정보의 탑을 부여잡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14시 30분에 아사쿠사 역에 도착하는 도부 스카이트리 라인의 급행열차는 역에 도착하기 전에 반드시 이 철교를 통과해야만 한다. 헤이와지마 시즈오는 오리하라 이자야가 녹음 파일을 회수하기 위해 이케부쿠로로 갔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거짓말이었고, 오리하라 이자야가 저 열차에 타고 있었던 거라면…….
그 추론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자야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시즈오를 향해 열쇠를 던졌다. 그녀는 그 열쇠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폭탄을 해제할 수 있는 열쇠였다. 그 열쇠는 시즈오의 정수리를 향해 정확히 날아갔고, 정수리에 부딪치더니 그대로 튀어나와 그의 손에 안착했다.
“이 빌어먹을 벼룩 새끼!! 그거 하나 똑바로 못 던져!?”
열쇠를 구멍에 집어넣어 다급한 손길로 폭탄을 해제하던 시즈오는 지나간 열차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열쇠로 정수리를 얻어맞은 것이 적잖게 불쾌한 눈치였다. 찰카닥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폭탄이 그것을 처음 건네받았을 때처럼 두 개로 갈라졌다. 폭탄을 멀리 던진 뒤 성큼성큼 걸어가 USB 메모리를 주워든 그는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탐정다운 일을 찾느니 차라리 집 나간 고양이 백 마리를 찾는 게 낫겠어.”
시즈오의 시계로 14시 32분 55초. 그렇게 게임이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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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일단 이자야 자식을 죽지 않을 만큼 패놓는 게 먼저긴 하지만. 잠깐, 벌써 전화를 해대는 걸 보니 이 자식도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군. 이 망할 벼룩 새끼!!! 누가 그걸 남의 정수리에 던지라고 했어!?”
사나운 손길로 휴대폰 화면의 잠금을 해제한 시즈오는 큰 소리로 이자야에게 일갈했다. 그러자 이자야의 얄미운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잠금을 해제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던 듯했다.
「시즈의 머리를 과녁이라고 생각하면 명중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것 같았거든―.」
“벼룩 너 이 새끼, 말 다 했냐!?”
「야아, 레이카 씨―. 살아있어? 시즈는 여자를 패는 취미도, 팰 마음도 없다고는 하지만 자기 목에 폭탄을 달아놓은 사람은 예외로 쳤을 것 같아서 묻는 거야.」
그녀는 터덜터덜 걸어와 시즈오와 멀지 않은 곳에 주저앉았다. 지금은 옷이 더러워지는 것조차도 생각하기 싫었다.
“덕분에. 처음부터……처음부터 이 순간을 염두에 두고 행동한 거였어?”
「처음부터는 아니었지만 이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지. 나도 이 순간을 숨기느라 꽤나 애먹었다고. 시너도, 녹음 파일 회수도…참, 시즈가 당신한테 던진 그건 사실 진짜야. 그걸 가짜라고 한 것도, 여유 넘치는 모습도 전부 눈속임이었어. 시즈가 연기를 잘 해줘서 천만다행이었지 뭐야. 시즈, 진짜 연기자의 피가 흐르긴 하나봐?」
“연기자의 피?”
「몰랐어? 그 녀석은 배우 하네지마 유헤이의 형이야. 당신은 흡혈닌자 카밀라 사이조 시리즈의 과학 분야 자문역을 맡았을 때 그를 가까이서 본 적이 있으니까 눈치 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하네지마 유헤이를 본 적이 있었던가. 레이카는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전 직장에서 그런 제목을 가진 영화에 과학 자문을 해준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때 본 무표정한 남자 배우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안 닮았잖아, 라고 중얼거리자 이자야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형제치고 확실히 안 닮았지. 특히 성격이.」
“이 자식, 내 동생 걸고넘어지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나저나 시즈의 휴대전화를 도청했었지? 당신은 그 휴대전화의 통화만 듣고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시즈한테는 전화기가 하나 더 있었어. 지금 통화중인 검은색 스마트폰 말이야. 설령 그 전화기의 존재를 알았다 해도 거기에는 비화기가 붙어있어서 당신이 세운 가짜 기지국으로도 도청할 수 없었을 거야.」
저 정도로 치밀하게 머리를 썼다면 자신도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다. 질 수밖에 없었겠네, 라고 작게 속삭인 그녀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두 사람, 서로를 전적으로 믿고 있던 것도 아니지?”
“그래, 솔직히 말하면 끝까지 여유로운 척을 하면서도 저 자식이 중간에 환승해서 다른 곳으로 내빼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고.”
「그래도 이 일그러진 도시에서 뒤틀린 믿음만큼 유용한 게 없다고, 레이카 씨. 일그러진 곳에서는 뒤틀리고 비뚤어진 것들이 똑바른 걸로 보이는 법이니까.」
“그런데도 어떻게 상대를 끝까지 믿을 수 있었는지는 도저히 모르겠어. 그 뒤틀린 믿음의 기저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거지?”
「그 뒤틀린 믿음 아래에 있는 건…….」
짧은 침묵이 찰나를 지배한 뒤, 싱겁기까지 한 결론 하나가 튀어나왔다.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그걸 정의내릴 수 있는 날이 오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 시즈랑 같이 있는 것뿐이야, 나는.」
그 말을 들은 그녀는 해탈한 듯 웃어버렸다. 웃음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되니 차라리 속이 후련하다고 말할 법한 그런 웃음이었다.
“도저히 못 당해내겠는걸, 정보상 씨에게는. 그나저나 하네지마 유헤이 얘기까지 나오는 걸 보면 나에 대해서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네.”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법한 사건이었으니까. 당신이 얽혀있던 그 일은.」
“그런가……. 그때 지겨울 정도로 신문에 내 이름이 오르내렸는데 이번에는 철창 행 소식으로 이름을 올리겠네.”
「레이카 씨가 경찰에 갈 일은 없을 거야.」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던 그녀도 그 말을 듣고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어째서냐고 이유를 묻는 그녀에게 이자야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대답했다.
「원하는 걸 다 얻었는데 굳이 경찰을 끌어들여서 일을 시끄럽게 만들 필요가 없잖아? 그리고 오랜만에 두뇌싸움으로 호각을 이루는 사람을 만났으니 경의를 표하는 차원에서 내가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해.」
“오늘만 해도 뒤통수를 몇 번이나 맞았는데, 믿을 수가 있을까 모르겠네.”
「믿을 건지 말 건지는 당신 자유야. 못 믿겠으면 일본을 떠나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럼 정보상 씨 옆에 있을 시로 군부터 이쪽으로 보내주지 그래? 나도 도망치려면 준비가 필요해서 말이야.”
“……그렇다는데, 타니자키 군.”
도부 이세사키 선 종착역인 아사쿠사 역. 대답 없이 전화를 끊은 이자야는 말간 얼굴을 한 청년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다시는 만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그 전에 들고 가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뭐죠?”
“네 선배가 잃어버린 물건.”
이자야가 등 뒤에서 꺼내 내민 것은 크라프트지로 만든 제법 두꺼운 쇼핑백이었다. 이자야에게서 그것을 받아든 시로는 쇼핑백의 무게에 한 번, 그 안에 든 내용물에 또 한 번 놀랐다. 쇼핑백 안의 내용물은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에 따르면 그랬다.
“이걸 어떻게 당신이…….”
“그쪽에서 파일을 날리기 전에 출력해뒀던 모양이야. 파벌은 달라도 그게 지닌 가치만큼은 제대로 알고 출처를 세탁해달라고 찾아온 것 같더군. 원래라면 돈을 받고 팔아야 맞지만 두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그냥 줄게. 그 안에 명함 하나를 넣어뒀는데, 명함에 적힌 사람에게 찾아가면 일본을 탈출해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봐줄 거야. ‘그녀’를 따라가면 당신들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겠지만……아까도 말했다시피 갈지 가지 않을지는 당신들 자유야.”
“…….”
시로는 그가 베푸는 호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적이라고 불러야 했던 사람이니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게임이 끝났으니 ‘잃어버렸던 것’을 찾아준 것에 대한 인사 정도는 괜찮을지도 몰랐다. 그는 휠체어에 탄 남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몸을 돌려 플랫폼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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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를 탄 남자 하나와 바텐더 복장을 한 금발머리 남자 하나가 아사쿠사 역을 빠져나와 느릿느릿 이동하고 있었다. 휠체어를 탄 남자가 환승은 귀찮다며 야마노테선을 탈 수 있는 우에노 역까지 걸어가자고 주장한 탓이었다. 금발머리 남자는 궁금한 것을 한참 참았었는지 불쑥 질문을 꺼냈다.
“야, 벼룩. 넌 처음부터 그 녀석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냐?”
“시즈, 몇 달 전에 이화학 연구소 부소장 선출 과정에서 잡음이 있었다는 거 알고 있었어?”
“일단 이화학연구소를 알고 있는지부터 물어보는 게 순서 아니냐?”
시즈오의 대답에 이자야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시즈오가 저런 식으로 되묻는 것은 밥 먹듯 있는 일이어서, 이자야에게는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하긴, 신문하고는 담을 쌓은 시즈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지. 이화학연구소는 문부과학성 소속의 과학 연구소인데, 몇 달 전 연구소 부소장이 지병을 이유로 물러난 탓에 후임자를 찾느라 고심하고 있었어. 현 연구소장이 나이가 있으니 젊은 피를 수혈하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뤘고, 선임연구원들 중 두 사람이 최종 후보에 올라갔어. 유명 사립 대학교 이공학술원 출신의 남자와 교토대학교 이학부 출신의 여자였지.”
“그러냐.”
“여자 쪽은 그간의 연구실적으로 승부하겠다고 밝혔는데, 남자 쪽도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럴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야. 연구소 내에 눈에 띄지 않는 파벌이 있었거든. 남자를 위시한 사립 대학교 출신 연구원들은 신문을 이용해 여론전을 펼쳤어. 주된 논지는 ‘여자가 뭘 할 수 있겠나, 여자의 과학적 소양은 남자의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다.’였다더군.”
옆에서 들린 자동차 경적 소리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경적 소리가 멎기를 기다리던 이자야는 말을 하면서 휠체어 바퀴를 굴리는 것이 힘들었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다 사건이 터진 거야. 여자가 아직 사이언스지에 기고하지 않은 미공개 논문이 출처 불명의 랜섬웨어의 공격을 받아 날아갔고, 여자는 울며 겨자 먹기로 후보 자리에서 사퇴했지. 여자가 사퇴하면서 차기 부소장 자리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차지가 됐어. 하지만 그 후에 그 정체불명의 랜섬웨어를 현 부소장이 퍼트렸다는 소문이 돌았고, 결정적인 증거가 될 통화 녹음을 손에 쥔 채 언론과 접촉하려던 릿쿄 대학교 이학부 출신 남자 연구원이 권고사직을 당했어. 외부에는 자의에 의한 사직이라고 보도됐지만 내부자 말로는 권고사직이었다더군.”
이야기가 이 정도까지 진행되니 깊게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시즈오도 이자야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눈치 챌 수 있었다. 시즈오는 자신의 추측이 틀리기를 바라며 입을 달싹였다.
“논문을 날렸다는 여자 연구원이랑 권고사직을 당했다는 남자 연구원이…그 두 사람이냐?”
“맞아, 이름은 좀 달랐지만. 참고로 그녀의 이름은 怜佳가 아니라 鈴夏라고 쓰거든. 본인 이름으로 말장난을 했던 거겠지. 여기서부터는 추론의 영역이지만, 그녀는 권고사직당한 타니자키 군이 만든 Cryptowall 4.0의 변종으로 그 사립 대학교 출신 연구원들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했을 거야. 타니자키 군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다른 학교 대학원에서 컴퓨터공학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니 변종 프로그램을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겠지. 복수를 위해 연구원들에게만 보냈을 메일에 시키 나리가 당한 건 타깃 중 하나의 개인 메일주소가 시키 나리 것과 비슷해서였을 거야. 의도치 않은 실수가 있었고 덕분에 연구원 한 명이 화를 면한 셈이지.”
“그럼 똑같이 당한 사람들은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지? 그리고 넌 그 둘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왜 이렇게 복잡한 방법으로 복호화 키를 회수한 거냐?”
“신고하고 경찰들이 수사에 착수하는 순간 이화학연 내에 파벌이 존재한다는 걸 시인해야 하니까. 그래서 그 사람들은 경찰에 신고할 수가 없었던 거야. 신고하면 윤리적으로 지탄받을 게 두려웠던 거지. 그리고 왜 그들의 정체를 알면서도 협박해서 키를 받아내지 않았냐면…오랜만에 시즈를 부려먹을 기회가 생겼으니 재미삼아?”
“그럼 너도 재미삼아 죽도록 맞아보지 그러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즈오는 발을 휘둘렀고, 이자야는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휠체어를 굴려 도망쳤다. 아사쿠사 일대를 몇 번쯤 도는 추격전 끝에 지친 두 사람은 휴전을 선언한 뒤 우에노 역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야, 이자야.”
“또 왜.”
“여기까지 왔는데 실크푸딩…….”
단 걸 좋아하는 시즈오가 어쩐지 조용하던 게 이상했다고 생각하며 이자야는 갔다 오라는 손짓을 했다.
“돈이 있으면 뭔들 못하겠어, 가서 사 와.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오늘 택시비로 돈 다 써서 돈 없는데.”
“그래서 뭐? 나보고 사달라고? 그거 사주면 뭐 해줄 건데?”
“그건 생각 좀 해보고.”
“푸딩 먹은 뒤에 입 싹 닦을 생각이지?”
“아니라고 했잖아!”
역시나 휴전은 잠시뿐이었다.
-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흰 양복 차림의 남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이런저런 파일을 열어보았다. 모든 파일이 순조롭게 열리자 그는 노트북을 덮고 손깍지를 낀 뒤 이렇게 말했다. 어디 한 군데 날아가거나 둘 중 하나는 죽어서 올 줄 알았더니.
“시키 나리에게 칭찬을 듣다니 기쁘군요.”
“성공 보수는 그때 말씀하신 금액에 맞춰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난 시키는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하다 고개를 돌려 탐정과 정보상을 바라보았다. 그 입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한 마디는 시즈오에게 와 사형선고가 되었다.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당신들, 그러니까 절름발이 콤비의 활약 말입니다.”
시즈오는 몇 해 전에 휴가 차 다녀온 기후 현 다카야마 시 키타진데의 밀밭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릴 적 꿈을 탐정이 아니라 귀농으로 정해서 밀밭 옆에 시골빵집을 차릴 걸 그랬다고 말하는 그의 중얼거림이, 신주쿠의 탐정사무소를 가득 채웠다.
Fin.
Written by Flaneur.
Reference : Shirodaira Kyo & Mizuno Eita, <スパイラル~推理の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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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정없이 길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中편을 셋으로 쪼갤 걸 그랬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듭니다.
요시타카의 이야기는 이공계의 여성이 직면한 유리천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화학연의 파벌에 대해 다루다 보니 STAP 논문 조작 사건이 떠오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오보카타 하루코의 논문 조작은 이화학연 내의 파벌 싸움과 관련이 있었죠) 자세히 살펴보면 결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여성이 어떻게 되었습니다, 하고 명확하게 결론을 내지 않은 것은 모두가 납득할 만한 결론을 써낼 만한 역량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성학적인 눈으로 볼 때 분명 탐탁치 않은 점이 나오겠지만, 그런 점이 더 나은 글을 위한 가르침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글입니다. 이 단편의 마지막이기도 하고, 제게는 (잠정적으로) 마지막 연성이 될 글이기도 합니다. 글을 쓰지 않기로 한 이유라면, 아마 단연 머리와 마음의 괴리라고 해야 할 거예요. 머리로는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마음으로는 감상을 바라게 되는 모순적인 모습이 싫었습니다. (노파심에 부연하지만, 문제는 전적으로 제게 있습니다. 감상은 의무가 아닌데, 의무가 아닌 것을 바라는 건 과한 것을 바라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요) 내 손에서 나온 글은 어땠는지 들려줄 가치가 없는 글이구나, 하고 반쯤 포기하면 마음은 편하지만 그래도 한구석에 자꾸 미련이 남아서... 떨쳐지지도 않는 미련을 떨쳐버리려면 안 쓰는 게 낫겠구나 싶었습니다. 혹자는 그런 걸 극복해야지, 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세상 모든 사람이 같은 현상에 직면해서 같은 해결책으로 문제를 타파한다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존재할 필요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다양한 답을 만드는 것이니까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두 분이 줄곧 감상을 주셨는데, 그분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의무도 아닌데 주셨던 그 글 덕분에 단편 하나에서 끝났을 이 공간을 여기까지 끌고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리트윗과 마음으로 답해주신 분들께도 감사를 전합니다. 제게는 그것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붙임) 트위터는 21일에 프로텍트로 돌리지만 블로그는 닫지 않습니다. 혹시나 재탕하시고 싶은 분들이 계시다면 초록창에 서치를 해보시면... (아무말)
붙임2) 머리싸움으로 점철된 글이라 행간에서 생략된 부분은 트위터에 따로 정리해 놓을 예정입니다. 읽으면 잃어버린 고리가 연결이 됩니다, 나름대로는...
16.09.18
시간의 틈에서, Flan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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