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De-lumination.
* 컬러버스 2부작 중 上편
* 컬러버스 AU 기반의 글입니다. 머리카락 색이 닮는 거 말고 소울메이트를 만나면 세상이 색으로 물든다는 그 세계관입니다. 본 글은 소울메이트가 죽음(혹은 그와 유사한 상태)에 이르면 색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가정 아래 전개됩니다. 작중 다른 등장인물들이 그 현상을 명확하게 컬러버스에 기반한 현상이라 정의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이런 현상을 겪는 사람이 대다수가 아니라는 저만의 설정 (...) 때문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처음부터 색을 보지 못하는 상태로 태어나고, 누군가는 색을 보다가도 소울메이트가 죽을 위기에 처한 때 색이 사라져 그것을 알게 되기도 하고, 그런 현상을 아예 겪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섞여있다는 느낌으로 읽어주세요. 그래서 학계에서는 본인들이 아는 범위의 용어를 통해 이 현상을 설명하려고 들지요. 중간 부분에 나오듯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감각상실이라거나...
* 세상 사물을 범주화해 하나씩 색이 사라져가는 과정을 기록했지만, 실제 색맹이라면 원래 색에서 그 색을 구성하는 색이 하나씩 빠지면서 점점 바래는 식으로 색이 사라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바이오의약품이나 바이오시밀러도 현실에 존재하는 개념이기는 하나 (최근 삼성이 바이오의약품 개발을 위해 바이오에피스라는 합작법인을 만들기도 했지요) 글 속에 서술된 용도로는 쓰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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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누전차단기가 떨어진 순간의 불빛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과, 생을 다한 가로등 불빛처럼 명멸하다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있다. 헤이와지마 시즈오에게 전자는 오리하라 이자야였고, 후자는―.
색(色)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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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부쿠로 최대의 항쟁이자 최후의 항쟁이 일어났던 밤이 지나갔다. 항쟁에 말려들었던 이들은 비일상의 영역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의 삶을 건져내 평화라는 이름에 그릇에 담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항쟁의 중심에 있었던 목 없는 라이더 세르티 스툴루손은 목을 찾는 일을 포기하고 연인인 키시타니 신라의 옆에 남기로 결정했다. 분명 목을 찾는 것보다 키시타니 신라의 곁에 머무르는 쪽이 훨씬 행복할 거라 판단한 것이었으리라. 다라즈의 창시자이자 라이라 3인방 중 한 명인 류가미네 미카도는 장기입원으로 인해 병실에서 유급 딱지를 받아들어야 했으며, 소노하라 앙리는 졸업 후 소노하라 당을 다시 여는 일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라이라 3인방 중 마지막 남은 한 명인 키다 마사오미는 소노하라 당에 넘겨줄 물건을 찾기 위해 미카지마 사키와 전국을 돌아다니는 삶을 택했다.
한편 세르티의 목을 빼돌렸던 야기리 나미에는 ‘목’ 연구를 위해 시카고 네브라 연구소로 자리를 옮겼고, 그녀의 동생 야기리 세이지는 그 목을 쫓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리마 미카는 그런 세이지를 지구 끝까지 쫓아갈 기세로 따라가는 웃지 못 할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모두가 그렇게 자신만의 평화를 향해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케부쿠로의 ‘전쟁콤비’ 중, 카리사와 에리카와 유마사키 워커가 애니메이트 본점을 거덜 낼 기세로 책을 쓸어 담고 사이먼이 여전히 알아듣지 못할 일본어로 호객 행위를 하는 이케부쿠로 거리에 남아 평화를 얻은 쪽은―.
시즈오였다.
최후의 항쟁이 일어난 다음날, 오리하라 이자야는 이케부쿠로에서 자취를 감췄다. 세르티는 시즈오에게 키네와 마미야 마나미라는 사람이―시즈오에게는 낯선 이름이었다.―그를 데리고 도쿄 도 밖으로 빠져나갔다고 알려줬지만, 그녀도 생사여부까지는 알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세르티는 이자야의 생사여부를 알아내지 못한 것을 못내 유감스럽게 생각했으나 지금 시즈오에게 이자야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자야가 사라졌고, 이케부쿠로에 그가 그토록 원하던 평화가 찾아왔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자야가 사라져 찾아온 그 ‘평화’라는 것이 의외의 방법으로 시즈오에게서 도망치기 시작한 것은―.
“오늘은 날이 흐리네요, 톰 선배. 하늘이 회색인 걸 보니.”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뭐라고?”
이케부쿠로의 맹수 조련사 다나카 톰은 하늘에 다시 검은 그림자가 덮였다는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제 후배는 못 할 말이라도 했냐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하늘이 잿빛이라 비가 올 것 같아서요. 오늘은 우산도 안 가지고 나왔는데…….”
미취학 아동에게 미팅 사이트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하는 어른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즈오, 선글라스 쓰고 있어서 그런 모양인데…지금 하늘은 놀라울 정도로 맑은 파란색이야.”
“……네?”
이번에 소스라치게 놀란 쪽은 시즈오였다. 그는 항상 끼고 다니던 선글라스를 벗고, 눈을 몇 번 비빈 후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선배가 말하는 ‘맑은 파란색’은 어디에도 없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눈앞에 선 사람에게 당신이 말한 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 상대를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아…제가 좀 피곤해서 회색이라고 착각한 모양이에요. 가요, 톰 선배.”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래, 그저 피곤해서 그럴 뿐이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에서 눈을 뗐고, 그 순간을 기점으로 그의 세계에서 ‘색’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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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이케부쿠로의 가로수들은 피곤해서 그랬을 거라는 시즈오의 가설을 대놓고 비웃기라도 하듯 밝은 잿빛으로 물든 나뭇잎을 흔들며 그를 맞았다. 화산재라도 뒤집어쓴 듯 고운 잿빛이 된 나뭇잎을 바라보며 시즈오는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색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적잖이 충격적이었는지 시즈오는 오전 징수 업무 내내 얼이 빠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채무자가 동생의 이름을 들먹거리는데도 그를 가만히 내버려뒀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 얼빠짐은 상당히 심한 수준이었다. 타인의 행동을 가지고 찧고 까불기를 좋아하는 이케부쿠로의 호사객들이 그 광경을 봤다면 분명 ‘헤이와지마 시즈오가 죽을병에 걸렸다더라.’ 하는 헛소문을 퍼트렸을 것이다.
차라리 허수아비를 세워놓는 게 낫지 않을까. 시즈오가 혼이 나간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두어 번쯤 반복된 뒤 다나카 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멍하니 서있는 후배를 향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혼자 할 테니까 들어가. 사무실에는 적당히 둘러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전 괜찮아요, 톰 선배.”
“내가 걱정이 돼서 그래, 내가. 그러니까 그냥 가.”
괜찮다며 한사코 손사래를 치던 시즈오는 선배의 걱정이 섞인 지청구에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하고 방향을 튼 그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직 불을 붙이지도 않은 담배에서 씁쓸함이 느껴지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미나미 이케부쿠로 공원의 한 벤치에―그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그 벤치는 그가 예전에 좀도둑을 흠씬 두들겨 패주기 위해 뽑아들었던 그 벤치였다.―털썩 걸터앉은 시즈오는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눈앞의 풍경을 들여다보았다. 눈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잿빛 세상이 그곳에 있었다. 어릴 적 동화책에서 봤던 회색머리 서리 요정이 나무지팡이를 휘둘러 서리를 흩뿌린 세상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닥친 현실은 동화 속의 낭만적인 장면과는 거리가 멀었다. 동화책 속의 서리는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그의 세상에 내린 서리는 사라질 리 없기 때문이었다.
히히힝―.
흡사 귀곡성과도 같은 말의 울음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이케부쿠로 같은 곳에서 말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그는 이런 소리를 내는 존재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절친한 친구가 뒤에 와 서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세르티.”
「슈터가 뒷모습만 보고 알아채서 반가워하는 바람에…놀랐어?」
“아니, 전혀.”
「이 시간에 여기 있다니 별일이네, 휴일이야?」
“휴일은 아니고, 조퇴 같은 거지.”
인간보다도 더 인간 같은 요정 친구와의 대화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시즈오는 문득 이 ‘목 없는 요정 친구’가 보는 세상이 어떨지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의 기저에는 목 대신 그림자로 만든 헬멧을 쓰고 있는 친구가 보는 세상은, 자신이 지금 보는 세상처럼 무엇 하나가 결핍된 세상이 아닐까 하는 기대가 짙게 깔려있었다. 실례가 될 질문임을 알면서도 그는 입을 열었다.
“세르티, 그…머리가 없어도 세상이 제대로 보여?”
「제대로 보인다는 게 뭘 말하는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굳이 예를 들자면 색 같은 게 제대로 보이냐는 소리였어.”
「아, 그 말이었어? 색이라면 물론 잘 보이지. 머리가 산산조각나지 않는 한 세상이 이상하게 보일 일은 없을 거야, 아마도.」
그 질문이 그다지 불쾌하지는 않았는지 세르티는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했다. 잘린 머리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게 일반적인 이 새까만 전투처녀에게는 그런 질문이 식상한 질문인 모양이었다. 순간 시즈오는 이형을 옆에 두고도 자신이 훨씬 더 괴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그런가…….”
괴물 취급을 받을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다니 지긋지긋하군. 그는 저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문제는 옆에 앉은 세르티가 그 혼잣말을 흘려듣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세르티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며 스마트폰 위를 날아다녔다.
「무슨 소리야, 시즈오. 너 설마…….」
「색이…안 보여?」
나뭇잎이 미풍에 사르륵거리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이케부쿠로의 목 없는 라이더는 친구에게 할 수 있는 조언이 너무나 시답잖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 시답잖은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내일 신라한테 가보자. 신라 녀석이라면 고칠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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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 사라지기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 시즈오는 세르티의 손에 이끌려 난생 처음 보는 실험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시즈오를 맞은 것은 오랜 친구이자 야매 의사인 키시타니 신라와 이제는 일본 황실에서도 안 쓸 것 같은 말투를 구사하는 레몬 색 머리의 여성이었다. 세르티가 어제 집에 돌아가 언질을 주기라도 한 것인지 신라는 말도 없이 다짜고짜 책 한 권을 내밀며 물었다.
“무슨 색으로 보여?”
“검은색.”
신라는 밝은 쪽빛 표지를 가진 책과 시즈오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세르티가 한 말이 허망지설은 아니었단 거네. 하긴, 마이 달링 세르티가 거짓말 같은 걸 할 리가 없잖아? 물건의 색이 사라졌단 말이지, 아직 멀쩡하게 보이는 거 있어?”
“어, 동물하고 사람 정도. 그나저나 이거 고칠 수 있는 거냐?”
“글쎄. 그건 이런저런 검사랑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와야 알 수 있어, 시즈오 군. 검사는 에밀리아 씨가 도와줄 거야.”
“잘 부탁드리옵니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발랄함을 가득 담아 말한 에밀리아는 시즈오를 데리고 실험실 안쪽으로 사라졌다. 쉴 틈 없이 몰아치는 검사 뒤 지난한 기다림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가 가져온 검사 결과지를 받아든 신라는 얼굴에 떠오른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에밀리아 씨, 검사 제대로 한 거 맞아요?”
“저도 놀랄 수밖에 없었사옵니다―. 색각 검사와 유전자 검사의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케이스가 있다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며칠 가둬놓고 해부를 한 번 해보고 싶사온ㄷ…….”
“하하하―. 에밀리아 씨, 농담도 잘 하신다니까. 밖에 아버지 와 계시던데 세르티랑 같이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시즈오가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 챈 신라는 세르티와 에밀리아를 문 쪽으로 떠밀어 두 사람을 내보낸 뒤 잽싸게 문을 잠갔다. 그는 시즈오가 진정할 때까지 숨죽여 기다린 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기, 시즈오 군. 이 이상한 증상의 치료법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미국에 있는데…전화 좀 해도 될까?”
“…….”
시즈오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묵시적 동의라고 간주한 신라는 스피커폰을 켠 채 어딘가로 부지런히 전화를 걸었고, 이윽고 어떤 여자의 쌀쌀맞은 목소리가 그들을 맞았다.
“또 뭐야, 변태 영감.”
“남의 아버지를 변태 영감이라고 부르다니 실례예요, 야기리 씨.”
“어머, 키시타니 선생님이었네? 오랜만이야. 그게 실례인지를 따지기 전에 아들보다 어린 여자를 꾀어서 결혼하는 중년 남자가 변태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게 먼저 아닐까?”
“하하하, 그것만은 어떻게 반박할 수가 없네요―. 그건 그렇고, 특이 케이스가 나타나서 전화 드렸어요. 통화 가능하신가요?”
구역질나는 옛 친구 이자야의 비서로 수년을 버틴 나미에를 당해내지 못하겠다는 듯, 신라는 놀라움과 어이없음을 담아 웃어버렸다. 그는 잘 지내냐는 안부인사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옛 동료인데 시간 정도는 내줘야지. 특이 케이스라는 게?”
“Dyschromatopsia(색각 이상, 색맹)요.”
“Protanopsia(적색맹)? 아니면 Deuteranopia(녹색맹)?”
“아니요, Achromatopsia(전색각 이상, 전색맹)요. 사물에서 색이 서서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사물의 종류별로 색이 통째로 사라진단 점에서 여느 Achromatopsia하고는 다르지만요.”
수화기 너머의 여자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사실이야?”
“네, 약물을 써서 고칠 수 있을까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귀국해서 연구해보고 싶을 정도인걸. 전색각 이상 환자는 10만 명에 한 명 꼴로 나올 만큼 희귀하니까. CNBG3, CNGA3, PDE6C, PDE6HI는 어땠어?”
“정상이었어요, 이상하게도.”
시즈오가 평생 들어본 적도 없는 의학용어의 홍수에서 혼란스러워 하고 있을 때쯤, 신라의 대답을 들은 나미에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그럼 가망 없어. 회사 내부 프로젝트인 바이오 의약품 개발에 희망을 건 모양인데 부질없는 짓이야.”
“비용 문제라면 바이오시밀러 (바이오 의약품의 비용을 낮추기 위해 만든 복제약품. 일반 의약품의 제네릭과 유사한 개념.) 개발도 동시에 진행한 걸로 아는데요.”
“유전자가 정상이라고 해놓고 바이오시밀러 얘기를 꺼내는 건 자가당착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키시타니 선생님. 바이오 약품이란 건 돌연변이 유전자를 대체할 유전자를 담고 있는데, 이미 정상 유전자를 가진 사람한테 투약해봐야 아무 의미 없지 않겠어?”
그녀의 거침없는 설명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신라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럼 약물을 가지고 감광색소 수치를 건드리는 방법은 어떨까요?”
“아이오돕신 수치가 정상 범위가 아니었어?”
“아니요, 그것도…….”
“희망고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원추세포를 구성하는 감광색소는 아이오돕신 말고도 두어 개가 더 있으니 시도해볼 만한 방법일 수도 있겠네. 물론 나머지 감광색소의 종류도 성질도 정확히 밝혀지질 않았으니 그 수치를 억지로 조절하는 약물을 쓰려면 환자도 목숨을 걸어야 할 거야. 당신, 아무리 야매 의사라지만 그래도 의사인데 환자를 사지로 밀어 넣을 자신 있어?”
“…….”
신라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해 마지않는 세르티였다. 세르티만 있다면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는 안중에도 없는 그였지만 시즈오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즈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사랑하는 세르티가 슬퍼할 게 자명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유전자 이상도 없는데 사물에서 색이 통째로 사라진다고 했었지?”
“그랬죠.”
“그럼 차라리 신경정신과나 심리상담소에 보내지 그래? 충격적인 사고를 겪고 그 사고로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감각의 상실을 보이는 현상을 다룬 연구보고서는 꽤 많은데, 대다수의 연구보고서가 내놓은 감각 상실의 원인은 예상가능성의 파괴로 인한 불안감이었어. 그러니 심리 상담으로 안정을 찾으면 증상이 멈출지도 모르지.”
“예상가능성의 파괴요?”
“그런 거 있잖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실이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닐 때 느끼는 불안감 말이야. 보고서의 연구대상들은 어제까지 존재했었고 내일도, 모레도 여전히 곁에 있을 것 같았던 소중한 사람들이 더 이상 곁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불안함을 느꼈다고 진술했어.”
“그 말 참고하도록 하죠. 새벽까지 전화기 붙들고 계시게 해서 좀 죄송하네요.”
“밤샘 연구는 흔한 일이니까. 이제 끊어도 되지?”
“물론입니다.”
마지막까지 쌀쌀맞은 그녀가 전화가 끊고 떠난 뒤, 신라는 시즈오를 향해 돌아서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의학용어가 난무했던 대화를 정리해 시즈오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세르티가 기동순찰대의 쿠즈하라 킨노스케와 절친한 친구가 되는 것보다 어려울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시즈오 군, 그러니까 네 눈에 있는 원추세포가 기능을 제대로 못 해ㅅ…….”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해.”
“그러니까 네 눈이 일을 제대로 안 해서 색이 안 보이는 건 맞는데, 일을 안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그래서 약물로 고칠 수가 없대. 일을 제대로 안 하는 이유를 모르니 맞는 약을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이야.”
세르티의 그림자보다도 무거운 침묵이 실험실에 내려앉았다. 고개를 숙인 시즈오도, 난처하다는 듯 머리를 헤집는 신라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두 사람을 짓누르던 침묵을 깬 쪽은 신라였다.
“난 야기리 나미에가 세르티의 목을 빼돌렸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못하지만, 약학 분야에서 그녀만한 실력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 그녀가 한 말은 대부분 사실일 거야. 그래서 말인데.”
“…….”
시즈오는 신라가 야기리 나미에의 마지막 말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몇 초 뒤 신라가 던질 질문을 생각해보았다. 신라 녀석은 분명 항쟁이 일어난 날 밤 그 녀석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 것이다.
“시즈오 군도 최근에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잖아. 시즈오 군의 인생에서 가족이나 친구만큼 큰 자리를 차지했는데 죽었을지도 모르는 사람, 없어?”
“없어.”
시즈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야매 의사 키시타니 신라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물었을 때,
“시즈오 군, 정말…….”
시즈오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없어?”
그 질문에 없다는 답을 하려고 입을 열면 오리하라 이자야라는 이름이 목구멍에서 핏덩어리가 튀어나오듯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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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와지마 씨, 손님 왔어요. 히지리베 루리는 같이 안 왔나봐, 저번에 실물 보니까 진짜 예쁘던데. 사무실의 여직원은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시즈오는 여직원이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 와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야, 형.”
슬쩍 들여다본 사무실 안쪽에서 그와 닮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것은 예상했던 대로 그의 동생 카스카였다. 제가 산송장으로 만들어놓은 잭 오 랜턴의 캐스팅 매니저를 도운 게 인연이 되어 연예계 데뷔를 하게 된 동생은 하네지마 유헤이라는 이름으로 배우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 제 동생은 이제 명실상부한 유명 연예인인데도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직장에 들이닥치곤 했다.
“냐앙-.”
시즈오가 저렇게 막 돌아다녀도 괜찮은 건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도쿠손마루의 울음소리가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밝은 회색 털과 검은색 눈. 그가 기억하던 갈색 털과 녹색 눈의 스코티쉬 폴드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아무래도 어제 사라진 것은 동물의 색이었던 모양이었다. 어제 하루 종일 집안에 처박혀 휴일을 보낸 그는 동물을 볼 일이 없었으니 동물에게서 색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시즈오는 어제 색이 사라지는 현상이 멈췄으니 곧 색이 돌아오리라고 내심 기대를 했던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무채색의 세상에서 유채색으로 선연히 빛나는 동생을 보며 그는 1년 치 상냥함을 지금 다 써버리겠다는 듯 반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어쩐 일이야, 차기작 고르느라 바쁠 줄 알았는데.”
“차기작은 어제 결정했어. 크랭크인 하고 나면 형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왔어. 키시타니 씨한테 들은 얘기도 있고. 형, 정말 괜찮아?”
카스카는 낯빛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그 눈에는 시즈오만이 알아볼 수 있는 걱정이 가득했다.
‘신라 자식, 또 쓸데없는 짓을…….’
그저께 신라에게서 충격적인 진단을 들은 뒤 연구실을 나서며 그는 자신이 볼 수 있는 색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못을 박았었다. 이미 압도적인 힘 때문에 괴물 취급을 받고 있는데, 거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더 다는 건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친구라는 녀석은 야매 의사도 의사라고, 의사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카스카에게 사실을 털어놓았을 게 뻔했다. 시즈오는 태연자약하게 시침을 떼며 말을 돌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떼는 것. 그게 자신을 걱정할 동생을 위해 형으로서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인지도 몰랐다.
“괜찮아, 신라 말 들어보니 시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 오히려 보이는 색이 몇 개 없으니까 세상이 훨씬 평화로울 지경이야. 차기작 정했다고? 흡혈 닌자 카밀라 사이조 시리즈?”
“아니, 스파이럴이란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야. 실종된 형을 찾아 나선 나루미 아유무가 예상가능성이 극히 낮은 상황에 휘말리면서 평화를 잃어버리는 모습을 그린 추리 판타지지. 원작자인 시로다이라 쿄 선생님이 시나리오를 집필하실 거라고 들었어.”
“아, 그 사람 이름 들어본 적 있어. 허구추리 강철인간 나나세…였나? 그거 쓴 작가 맞지?”
“응, 맞아.”
시로다이라 쿄. 그 이름은 책과는 담을 쌓고 산 시즈오도 몇 번쯤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징수 업무를 하러 돌아다니며 몇 번이고 지나친 준쿠도 서점(ジュンク堂書店) 앞에 그녀가 쓴 ‘허구추리: 강철인간 나나세’의 포스터가 대문짝만하게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포스터에 적힌 ‘제 12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 순수한 허구가 자아내는 극한의 추리극!’이라는 문구를 들여다보며 나중에 탐정이 되려면 필요할지도 모르니 사서 읽어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물론 그 생각은 며칠 전부터 그의 삶을 뒤흔들고 있는 문제 때문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가 오래였다.
“잘 됐네, 문학상까지 받는 작가가 시나리오를 집필하면 흥행은 따 놓은 당상일 테니까. 개봉하면 없는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보러 갈게.”
“사실 나루미 아유무 역으로 캐스팅하고 싶다는 제의가 들어왔을 때 고사하려고 했었어. 나루미 아유무는 나처럼 감정이 희박한 캐릭터라 나에게 나눠줄 ‘인간의 마음’이 없었으니까.”
동생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한마디에 시즈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절하려고 한 영화를 다시 찍겠다고 번복한 것이 그의 눈에 꽤나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 순간 유쾌하지 못한 추측이 그의 뇌리를 스쳤고, 그는 금방이라도 손에 잡히는 물건을 집어던질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제작사나 소속사에서 널 협박하기라도 했어? 그런 거면 협박한 놈을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놓ㅇ…….”
“아니. 그런 게 아니야, 형. 마음을 바꾼 건 키시타니 씨의 전화 때문이었어.”
“신라가 전화해서 그 영화 찍으라고 했어? 세르티가 좋아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형이랑 닮았거든.”
속에서 짜증이 치솟는 것을 달래기 위해 시즈오가 집어든 딸기크림 프라푸치노가 허공에서 갈 길을 잃었다.
“예상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헤매는 나루미 아유무가 평화라는 이름의 예상가능성을 잃어버린 형이랑 겹쳐보여서…그래서 하겠다고 했어. 형이 남들은 모르는 내 감정을 알아챌 수 있는 것처럼 나도 형이 숨기는 감정을 알아챌 수 있어. 내 눈에 형은 지금 내일 일어날 일조차 예상할 수 없어서 불안해 보여, 내 말이 틀려?”
그 말과 동시에 시즈오는 누군가 카스카의 머리카락에서 멜라닌 색소를 훔치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머리카락이 잿빛으로 변해버리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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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시즈오는 회사에 찾아가 오늘 하루 휴가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휴가 사용을 당일에 통보하는 것은 상당히 무례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충격 때문에 색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 사장은 장기 병가를 쓰는 게 낫지 않겠냐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는 진단서 안 가져와도 병가 기간 동안의 급여는 제대로 처리해줄 테니까 충격이 가라앉을 때까지는 쉬어도 돼, 라고 말했지만 시즈오는 그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자신은 매번 기물파손을 하고도 해고당하지 않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과분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월급까지 꼬박꼬박 나오는 장기 병가를 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정적으로 자신도 세상이 언제 총천연색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럴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시즈오는 소파에 아무렇게나 늘어진 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내 하얀 연기가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며 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색을 잃어버리기 전에도, 잃어버린 후에도 여전히 새하얀 자태를 자랑하는 담배 연기가 자신을 위로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혹자는 그게 무슨 위로냐고 비웃겠지만 지금 그에게 자신이 예상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위로였다.
“신라 자식도 카스카도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아니, 적어도 카스카는 그의 정곡을 찌르는 말을 했다. 그는 내일 무엇의 색이 사라져있을지 언제쯤 모든 것의 색이 사라질지 예상할 수 없어서 불안했다. 게다가 그 색들이 언제 돌아올지도 예상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 불안감을 몇 배로 증폭시켰다. 결국 동생의 말대로 자신은 아무 것도 예상할 수 없어서 평화롭지 못한 상황에 놓여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말만은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정확히 말하면 야기리 나미에라는 여자는― 충격적인 사고를 겪고 그 과정에서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사람에게서 색이 사라지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그는 소중한 사람이 내일도 곁에 있을 거라는 예상가능성이 소멸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생긴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신라는 그에게 충격적인 사고 속에서 중요한 사람이 죽지 않았냐고 물었었다.
그때 그가 오리하라 이자야라는 답을 할 뻔했던 것은 오리하라 이자야가 시즈오에게 중요한 사람이기는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자야는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범주에 속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가족이나 친구는 좋은 쪽으로 중요한 사람이었지만 오리하라 이자야는 그에게 ‘나쁜 쪽으로’ 중요한 사람이었으니까. 한없이 증오하기 때문에 중요한 사람. 그게 시즈오가 생각하는 오리하라 이자야였다. 그러니 이자야가 사라져서 찾아온 불안감에 색이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다. 차라리 절친한 친구가 형태를 잃어버릴 정도로 폭주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그리 되었다는 주장이 훨씬 납득하기 쉬웠다.
“그리고 그 자식이 그렇게 쉽게 죽었을 리가 없잖아.”
세르티는 최후의 항쟁이 일어난 날 밤 자신이 그림자로 오리하라 이자야의 상처를 지혈했고, 자신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에 기분나빠한 이자야가 키네와 마미야 마나미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도쿄를 빠져나갔다고 했다. 상식적으로 상처를 지혈한 데다 조력자의 도움을 받았다면 그는 곧장 병원으로 향했을 것이 분명했다. 제 몸 하나는 끔찍이 챙기는 오리하라 이자야가 시즈오를 죽이지도 못했는데 스스로 삶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이자야가 도쿄에서 사라진 마당에 그의 생사를 따지는 것은 시즈오에게 의미가 없었지만, 그에게는 신라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이자야가 죽지 않았다는 그 믿음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난 이자야 자식 때문에 이렇게 된 게 아니라고.
시즈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는 불현듯 담배를 비벼 끄고 있는 손이 칙칙하게 변해버렸음을 깨달았다. 오늘 색이 사라진 건 피부인 모양이었다. 이제 어디에 색이 남아있을지, 아니 남아있기는 한 건지조차 알 수가 없어 시즈오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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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이 사라지기 시작한 지 7일째, 이케부쿠로 일각.
시즈오는 귀자모신을 모셔둔 법명사의 계단에 앉아있었다. 선배인 톰이 ‘다음번에 가야 할 곳 말인데, 부모는 일하러 나갔는지 어린애만 집에 있는 모양이야. 그러니 혼자 갔다 올게.’라고 했던 탓이었다. 그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고 물었지만 톰은 너도 국민 영예상을 받을 만한 연기를 두 번씩이나 하긴 힘들 거 아냐, 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는 시즈오가 어린아이를 울리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유일하게 색이 남아있는 밤색 눈동자가 분에 넘칠 정도로 따뜻해서 그는 선배의 말에 토를 달지 못하고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신사 계단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시즈오 씨―!”
“…안녕하세요.”
“쿠루리랑 마이루냐.”
요란하게, 혹은 조용하게 시즈오를 부른 두 사람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와 그의 앞에 멈춰 섰다. 갑작스럽게 오리하라 이자야를 빼닮은 붉은 눈이 시야에 가득 찼다. 그에게 다가온 두 사람은 오리하라 이자야의 쌍둥이 여동생들이었다. 쌍둥이 중 동생인 마이루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뭐야, 뭐야? 휴일? 시즈오 씨, 저번에도 여기 있더니 여기 엄청 좋아하나봐―. 그런데 잠 못 잤어요? 얼굴이 삭았는데요?”
“熊(다크서클)…….”
“누구 동생인지 못 하는 말이 없군. 그나저나 너희는 도장 갔다 오는 길이냐?”
오리하라 쌍둥이는 제 오빠가 시즈오가 원수지간이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는지 시즈오와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네! 오늘은 스승님하고 제대로 한 판 해볼까 했는데 스승님은 스승씩이나 돼가지고 도망이나 가고 말이야―. 맞다, 유헤이 씨는 언제 소개시켜줄 거예요?”
“그저께 만나긴 했지만 영화 촬영 때문에 바쁘대서 당분간은 곤란할 것 같은데.”
“영화요!? 유헤이 씨, 새 영화 찍어요? 무슨 영화인데요?”
“무슨 만화 가지고 만드는 영화라고 했는데…스파이럴이라고 했던가?”
“아, 그거 봤어요!! 무슨 역이에요!? 나루미 아유무로 나와도 좋지만 아이즈 러더포드로 나오면 은발의 유헤이 씨를 볼 수 있을 텐데―!!”
마이루는 그 붉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시즈오에게 질문 세례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퍼부었다. 그는 혼잣말 세례를 들으며 제정신을 유지할 자신이 없어 재빨리 말을 끊었다.
“나루미 아유무 역에 캐스팅됐다고 하더군.”
“그래요!? 유이자키 히요노 역은 오디션으로 뽑으려나? 그럼 당장 가서 오디션 볼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이자 오빠한테 유이자키 히요노같은 정보통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봐둘걸 그랬어!”
“이자 오빠, 생사 불명…….”
그때 시즈오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마이루의 눈에서 붉은 빛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보았다. 그 붉은 빛은 수명을 다한 가로등 불빛처럼 위태롭게 깜빡거렸다.
“쿠루 언니, 나 양 갈래로 땋은 머리 하면 오디션 봐도 승산 있지 않을까? 어떻게 생각해!? 이 정도면 가능성 있지 않아!?”
그는 잘못 본 건가 싶어 짧게 눈을 깜빡였고, 붉은 빛은 처음부터 사라진 적이 없었다는 듯 새초롬한 모습으로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동생에게 어깨를 잡혀 사정없이 휘청거리던 단발머리 소녀는 입을 열어 동생에게 꿈도 희망도 없는 대답을 해주다 의아하다는 눈으로 시즈오를 바라보았다.
“몰라……. 시즈오 씨? 왜 그러세요?”
그리고 거짓말처럼, 오리하라 이자야의 것과 같은 색을 한 두 쌍의 눈에서 색이 사라졌다.
“…니야.”
그는 그 순간 그의 직감이 어느 때보다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직감이란 것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오리하라 이자야는 죽었어,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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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유채색도 보이지 않는 이케부쿠로 거리를 지나 집으로 돌아온 시즈오는 목에 걸려있던 나비넥타이를 책상 위에 집어던졌다. 마지막 남은 색이 사라지면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 줄 알았는데, 이미 사라진 색이 너무 많아서였는지 의외로 대단한 절망감도 상실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흐트러진 나비넥타이 옆에 가지런히 놓인 물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저것도 쓸 데가 없겠군.’
시선 끝에 자리한 것은 이자야가 쓰던 나이프였다. 항쟁의 날 밤, 이자야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이프 하나에만 의지해 시즈오를 죽이려고 했었다. 이자야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난투극의 현장에 나이프를 떨어뜨리고 사라졌을 때 시즈오는 그것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었다. 그래야만 할 의무도 없었고 자신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도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철천지원수의 무기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 날 이후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자국이 그대로 남은 그 칼은 지박령이라도 된 듯 시즈오의 책상 한 구석을 차지했다.
‘……핏자국이 잠깐 붉은 색으로 보였던 것 같은데.’
시즈오는 나이프를 집어 들어 서랍에 넣으려는 순간, 아주 잠깐 동안 핏자국이 붉은 색으로 빛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에서 색이 사라진 마당에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그는 이내 기분 탓인가, 라고 중얼거리고는 나이프를 넣고 서랍을 닫았다. 그러고 나서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색연필 ―작년 생일에 카스카가 보내준 컬러링 북 세트에 들어있던 색연필이었다.― 중 하나를 집어 탁상달력의 오늘 날짜에 가위표를 쳤다.
그 투박한 가위표시는 시즈오의 평화롭지 못할 일상이, 색이 돌아오는 기적을 향한 지루한 기다림이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To be continued.
Written by Flan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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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마지막에 핏자국에서 색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핏자국은 금방 거무튀튀한 붉은색으로 변하는데, 다크 그레이시톤의 레드 컬러는 검은색과 비슷해서 (PCCS 표색계 상에서)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는 한 빨간색이구나 하고 알아보기 힘들기 때문이에요. 가뜩이나 자신이 이제 색을 보지 못할 거라고 강하게 믿는 시즈오라면 더더욱 알아보기 힘들었을 거예요.
* 남은 뒷이야기도 즐겁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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